「남근석과 박잉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1237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세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7년 12월 31일 - 남근석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13호 지정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1년 - 「남근석과 박잉걸」 『정읍의 전설』에 수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1년 9월 25일 - 「남근석과 박잉걸」 『정읍의 전설』 증보판에 수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남근석 전라북도 민속문화재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1월 18일 - 남근석 전북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로 변경
관련 지명 남근석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1095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박잉걸|노승
모티프 유형 남근 숭배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입구에 있는 남근석과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남근석과 박잉걸」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입구에 서 있는, 일명 ‘자지바우’라고 하는 남근석(男根石)의 유래담과 남근석을 만든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1676~?]에 관한 인물담이다. 성기 숭배(性器 崇拜)의 한 형태인 남근석백암리의 기자(祈子)의 대상이기도 하다. 남근석 앞에 제수를 차려 놓고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비는 당산제를 지낸다. 또한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아들 낳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밤에 떡과 과일 등을 차려 놓고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백암리남근석은 1977년 12월 31일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전라북도 민속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1월 18일 전북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로 변경되었다.

[채록/수집 상황]

「남근석과 박잉걸」은 정읍 출신 시인이자 수필가인 김동필(金東必)[1939~2006]이 1989년 채록하기 시작하여 1991년에 간행한 『정읍의 전설』에 수록되었고, 2001년 9월 25일 간행한 『정읍의 전설』 증보판에도 수록되었다.

[내용]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원백암리] 입구에 있는 당산석(堂山石)은 모양이 꼭 남자의 생식기와 같아서 ‘남근석’이라고 부른다. 백암리남근석이 세워질 당시에는 남근형의 당산석이 스물네 개였으나 3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다 없어지고 한 개가 전하여지고 있다고 한다. 남근석의 좌대 높이는 1.22m이고, 둘레는 2m, 남근의 길이는 1.4m, 둘레는 밑부분이 0.83m, 가운데 부분이 0.72m이다. 당산나무 아래로 1m 정도 떨어진 좌대 위에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다. 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300여 년 전 백암리에 살았던 모은 박잉걸이라는 사람이 남근석을 세웠다고 한다. 박잉걸은 1676년(숙종 2)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서 태어났고, 만년에 이르러 활발한 자선 활동을 펼쳤다. 박잉걸이 많은 사재를 들여 자선 사업을 베푼 동기에 대한 일화가 전한다. 박잉걸이 말년에 이르러 몸통에 비늘 같은 것이 생겨 이름 있는 명의를 불러 약을 쓰고 다스렸으나 이렇다 할 효험이 없었다.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신통한 묘약이 없었다. 어느 날 박잉걸이 길을 걷다가 고개 중턱에 앉아 한참 쉬고 있었는데, 때마침 재에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승이 내려와서 자신의 치료 방법에 대하여 말하였다.

“대감, 신액(身厄)을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노승의 말을 들은 박잉걸은 귀가 번쩍하여 좋은 비방을 알려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노승이 말하였다.

“중생에게 적선하시오. 우선 이 험한 길을 닦으시오.”

노승은 말을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갯길을 내려가 버렸다. 그 순간 박잉걸은 가던 길을 멈추고 백암리로 돌아와서 중생을 건지는 자선 사업을 시작하였다. 현재의 정읍시 태인면 거산리 하천에 대각교(大脚橋)라는 다리를 놓고, 태인 고을 육방(六房)에 많은 토지를 희사하여 아전들이 백성을 괴롭히지 않도록 하였다.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백암초등학교 주변 흥삼마을은 ‘걸치기’라고도 불리는데, 걸치기는 박잉걸이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언제라도 옷을 가져갈 수 있도록 나무에 옷과 신발을 걸어 놓은 것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춘궁기에는 집의 곳간을 열어 밥을 제공하고,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1745년(영조 21)에는 칠보면 시산리구절재[구절치] 고갯길을 닦았고, 1746년 봄에는 굴재[굴치]의 고갯길을 닦았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불에 탔던 석탄사(石灘寺)를 중건하고, 남근석을 세우기도 하였다. 효행도 뛰어나 나라에서 박잉걸에게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박잉걸이 죽어서 중국의 황태자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생전에 남을 위하여 자선을 많이 하고 불사(佛事)를 성실히 행한 공덕으로 중국의 황태자로 환생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중국 어느 황태자가 세상에 태어난 지 반년이 지나도록 왼손의 손바닥을 펴지 못하고 쥐고만 있었다고 한다. 하도 이상하여서 억지로 손바닥을 펴 보니 ‘조선 박잉걸 환생(朝鮮 朴仍傑 還生)’이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써 있었다고 한다. 박잉걸의 선행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고마움이 귀한 존재로의 환생을 바라는 기원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모티프 분석]

「남근석과 박잉걸」은 자손 번성과 마을 번창과 풍년을 기원하는 남근 숭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남근석은 민간에서 숭배 대상으로 전승되어 온 성기 모양의 돌을 가리키는데, 많은 자손을 생산하여 대를 잇고 마을의 번영을 도모하는 기자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칠보면 백암리에서도 남근석은 기자의 신앙물로서 신성시되는데, 바위에 해를 끼치면 눈이 먼다는 믿음까지 전하여지고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무척 아끼고 숭상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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