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량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1275
한자 貞良里
이칭/별칭 「정량리 노래」,「정량소년교육장려가」,「물산장려가」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성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형성 시기/일시 1930년대 - 「정량리」 김승옥이 작사·작곡
채록 시기/일시 2003년 2월 6일 - 「정량리」 송재옥에게 채록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4년 1월 10일 - 「정량리」 『전라북도 마을지킴이·정악』에 수록
채록지 원정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원정 지도보기
가창권역 정량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지도보기
성격 창가
형식 구분 4·4조

[정의]

1930년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에서 김승옥이 창작한 창가.

[개설]

「정량리」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에 전승되는 창가풍(唱歌風)의 노래이다. 1930년대 정량리의 마을 훈장이던 김승옥(金承玉)이 작사·작곡한 노래이다.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은 음력 1월 16일에 당산제를 시행한다. 정량리 원정 당산제는 한 해 동안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줄다리기와 함께 행하여진다. 또 정량리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김개남(金開南)[1853~1894]이 출생한 곳이고,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송월주(宋月珠)[1935~2022]의 고향이기도 하다. 정량리 당산나무는 마을 입구에 조성된 마을 숲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수구막이로 조성된 마을 숲 안에 ‘훈장 김승옥 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정량리」는 일명 「정량소년교육장려가」, 혹은 「물산장려가」라고도 한다. 현재도 정량리에서는 당산제와 같은 마을 행사 때 「정량리」를 부른다.

[채록/수집 상황]

훈장 김승옥 선생 기념비에는 「정량리」와 훈장 김승옥에 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량동 사람들은 큰 행사가 있거나 몇 사람만 모여도 김승옥 선생의 유훈을 이야기하고, 선생이 작사하고 곡을 붙인 「정량소년교육장려가」, 또는 「물산장려가」를 부르곤 한다. 그러나 선생에게서 배웠거나 대면한 분은 이제 90에 가까운 몇 분뿐이다. 선생이 정량동에 학당을 연 시기는 1930년대 초중반으로 전남 무안에서 오신 분이다. 당시는 개화의 문물이 열리는 시기로 시골에 신교육을 받은 분이 거의 없고 소수의 한문학을 익힌 사람이 있었다. 선생은 신학문과 경세를 갖춘 분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산외면 내는 물론 임실, 운암에서까지 수학생이 모였다. 선생의 지도 이념이 특히 애국·애민하며 신문화에 눈뜨게 하였고, 수학·지리·음악·외래어·작문도 능통하였다. 문하생이 과도기 선구적이며 개혁적인 신교육의 가르침에 힘입어, 후에 여러 분야의 지역 개발에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기본이 되었다. 선생은 여러 해 훈학하다가 홀연히 사유를 남기지 않은 채 행적을 감췄다. 짐작컨대 사상가,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나 생각들을 했다. 해방과 더불어 광주에서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교통사고로 작고하였다는 풍문이 들렸으나, 시절이 곤궁하고 전란이 겹쳐 공적이 회자되어 왔을 뿐 누구도 선양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이러한 내력을 집 형님들과 문하생, 동네 유지들로부터 듣고 자란 월주 스님께서 이 시기가 넘으면 행적이 묻힐 것이니 선생의 공적을 현창토록 권장하고 후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정량 동민들도 감흥하고 환영하여 뜻을 모아 기념비를 세움이라. 이 기회로 선생의 훈풍을 되살려 후손들이 더 활기차고 새롭게 배우고 노력하여 복을 짓고 지역 사회를 풍요롭게 일궈 가기를 기원하면서 선생의 명복을 빈다. 2014년 5월 송재옥 적음”

「정량리」와 창작자인 김승옥에 대한 내용은 2003년 2월 6일 김성식이 현장 조사를 나가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의 주민 송재옥[남, 88세]에게 제보를 받았다.

[구성 및 형식]

창가는 개화기에 나타난 새로운 시, 즉 신시(新詩) 양식의 시가(詩歌)를 말한다. 가사는 시조풍의 4·4조가 주를 이룬다. 창가의 양식은 이후에 7·5조, 8·5조 등으로 변하면서 문학사에서 자유시, 신체시(新體詩)를 낳는다. 창가는 찬송가로 대표되는 외래의 음악적 리듬을 수용하여, 가사에 음곡(音曲)을 붙여 불렀는데, 「정량리」도 4.4조의 시가와 찬송가풍의 음곡으로 구성된 노래이다.

[내용]

북편에는 상두산이 등대가 되고 남편에는 북방산이 뻗쳐 내려와

전후좌우 고운 산이 병풍이 되어 한 많이 앉아 있는 우리 정량리

강산 정기 타고난 정량 소년아 나태심과 자만심을 속히 버리고

무궁화 밝은 곳에 할 무대 찾아 빛내어라 소년들아 정량 소년아

산도 곱고 들도 맑은 이 강산 속에 우리 동네 남녀노소 모여 사는 곳

낮에로는 밭갈이와 밤에 글 읽기 사람 되어 할 본분이 분명하도다

[후렴]

만세 만세 노래 부르자 만세만세 우리 정량리

선인들의 유업 받아 효제충성을 일시라도 잊을소냐 정량 소년아

[현황]

산외면 정량리는 현재도 마을 행사가 있을 경우 「정량리」를 먼저 부르고 본 행사를 시작한다.

[의의와 평가]

「정량리」는 일제 강점기에 마을의 한 지식인이 미래 세대를 향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 정신과 진취적인 기상을 품으라는 내용의 가사를 짓고, 당시 유행하던 창가 곡조를 차용하여 만든 노래이다. 민간에서 ‘마을가’를 만든 보기 드문 사례이다. 세대가 바뀌면서 노래에 대한 유래와 배경을 잊을 수 있기 때문에 노래비를 세워 기록으로 남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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