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010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재영

[정의]

일제 강점기 한·중·일 삼국을 넘나들며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아나키즘(Anarchism)과 아나키스트(Anarchist)]

아나키즘이라는 용어가 무정부주의라는 뜻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02년 일본 도쿄대학교 학생 게무리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가 『근대무정부주의』를 발간하면서부터였다. 이후에는 아예 정부가 없는 혼돈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원래는 우두머리, 강제권, 전제 따위를 배격한다는 뜻이다. 아나키즘은 말 그대로 그리스어의 ‘없다(an)’와 ‘지배자(arche)’라는 뜻의 합성어로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무강권주의’ 또는 ‘자유연합주의’가 될 것이다. 아나키즘을 자유연합주의로도 부르는 이유는 자유를 중시하지만 동시에 개인 간의 연대도 대단히 중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는 이회영(李會榮)과 일제가 사형시킨 엄형순(嚴亨淳), 일제 감옥에서 옥사한 신채호(申采浩)·백정기(白貞基), 그리고 김구(金九)가 말하는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형제, 유자명(柳子明)을 비롯한 김종진(金宗鎭)·정현섭(鄭賢燮)·박열(朴烈) 등이 있다. 이회영은 아나키스트 운동을 태동기, 조직기, 전투기로 나눌 때 태동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인물이고, 유자명은 1920년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의열단(義烈團)에 아나키즘이란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 인물이다.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차이점]

아나키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무정부주의는 공산주의의 사촌”이라고 비판한다. 아나키스트들이 그동안 존재 여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냉전 체제 아래에서 아나키즘이 공산주의의 사촌으로 몰린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무정부주의는 자본주의 사회 타도와 사유 재산 제도의 철폐, 무계급착취 사회 건설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와 비슷하지만, 그 주요 목표를 자유에 대한 관심과 통치 기구의 폐지를 촉진하는 데 둠으로써 독재를 용인하는 공산주의와는 큰 차이가 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당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며, 당명 또한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하는 지상 명제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는 모든 독재를 거부하면서 인간의 참된 해방을 지향한다.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것에는 인식을 같이하지만, 권위주의에 대한 태도는 극과 극을 달릴 만큼 서로 다르다.

[백정기 의사, 구학문과 신학문을 공부하다]

백정기 의사는 1896년 1월 19일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현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지금의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로 이주하였다. 삼례도찰방을 지낸 박만환(朴晩煥)[1849-1926]이 1903년에 설립한 영주정사(瀛州精舍)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이때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당시 호남 명문가의 자제들인 백관수(白寬洙)·김성수(金性洙) 등과 같이 공부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의 영학숙(英學塾)으로 옮겨 송진우(宋鎭禹)·김병로(金炳魯)·양태승(梁泰承) 등과 함께 신학문을 익혔다. 영학숙은 호남 근대 교육의 창시자로 불리는 창평 갑부 고정주(高鼎柱)가 세운 학교였다.

영주정사가 한말 국운이 쇠하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길 조짐이 있던 시기에 세워졌고, 영학숙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이후에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두 학교가 민족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호남 지역 구학문을 대표하는 곳이 영주정사라면, 근대 학문을 대표하는 곳이 영학숙이었다. 이 두 곳이 호남 지역 인재 양성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영주정사의 설립자인 박만환의 민족의식은 1920년대 백정기와 백관수 그리고 아들인 박승규의 민족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영학숙에서 만난 김성수·백관수·김병로·송진우 등은 일본 유학 시절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까지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민주당의 중추적인 요인으로 성장하였다.

[식민지 조선과 일본에서 독립운동]

백정기 의사는 1914년 말에서 1915년 초 추운 겨울날, 민가에 난입하여 씨앗과 물레를 짓밟는 일제 경찰을 무자비하게 폭행하였다. 물레는 당시 천을 짜는 농민들의 생존을 위한 중요한 수공업 도구였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일제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백정기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갔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에 내려와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동지들과 경인(京仁)[서울과 인천] 간 일본 군사 시설 파괴를 꾀하다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다행히 본적지와 행적을 속여 풀려날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백정기 의사는 영주정사 설립자 박만환의 아들 박승규를 비롯한 최동규·김기홍 등과 함께 일본 천황을 암살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박승규는 1923년 8월 6일에 전답 3만 평을 담보로 군산의 일본인 쌀장수로부터 3,500원을 빌렸고, 1924년 6월에는 부인 김예동 명의로 다시 1,400원을 빌렸다. 이렇게 마련된 돈으로 백정기 의사는 1923년 8월 초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사전 조사를 벌였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여의치 못하자 20일 만에 귀국하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독립운동]

백정기 의사는 1924년 6월 북경에서 결성된 재중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였고, 1925년 5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과 영국 자본가를 상대로 하는 상하이 총파업을 주도하였다. 1928년 2월에는 상하이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였다. 이후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과 연합하여 1931년 11월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였고, 항일구국연맹은 흑색공포단[BTP, Black terrorist party]의 모체가 되었다. 항일구국연맹은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정화암(鄭華岩)이 지휘하고 중국인 왕아초(王亞樵)가 재정과 무기 공급을 맡았던 비밀 결사였다.

백정기 의사는 1933년 3월 17일 상하이 공동조계에 있는 일본 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일본 정계·군사계 거물들과 중국 국민당 고관들의 회합이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참석자 중에는 일본 육군대장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와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정보를 제공한 자는 자칭 아나키스트인 부유한 일본인 오키라는 자였다. 아라키는 일본 군부를 대표하는 육군대신으로 일본 총리대신보다 더 실권이 있었던 인물이고, 아리요시는 무수히 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한 장본인이었다.

남화한인청년연맹 동지들은 너도나도 실행자로 나섰다. 이에 아리요시의 이름자인 한자 ‘유(有)’ 자를 뽑는 제비뽑기로 실행자를 선발하기로 결정한 결과 백정기 의사가 ‘유’ 자를 뽑았고, 백정기 의사는 함께할 동지로 이강훈(李康勳)을 지목하였다. 김제 출신 정화암은 폭탄 두 개와 수류탄 한 개, 권총 두 자루와 탄환 20발을 준비하였다. 3월 17일 백정기 의사는 이강훈·정화암·원심창(元心昌) 등과 함께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기 직전 일본인 오키의 사전 정보 누설로 체포되어 안타깝게 의거는 실패하였다.

[상하이 육삼정(六三亭) 의거의 의의]

백정기 의사는 일본 나가사키[長崎]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933년 11월 1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폭발물취체법」 위반, 살인 예비, 기물 파손 등의 혐의로 공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백정기 의사는 모든 것을 자기가 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사형 구형에 무기형을 언도받고 수감되어 있던 중 1934년 6월 5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백정기 의사와 함께 중국에서 자취를 하였던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은 “그 많은 사람 중에 백정기 선생과 엄형순 선생 같은 분은 이 세계에 둘도 없는 분으로 생각한다”라고 하였고, 육삼정 의거를 함께 일으킨 이강훈도 “의리가 대단한 분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한편,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이강훈은 12년 6개월을 복역한 후 일제가 패망하자 석방되었다. 그 후 박열과 함께 일본에서 거류민단 활동을 하다가 귀국 후 광복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무기형을 선고받은 원심창도 광복 후에야 석방될 수 있었으며, 광복 후 아나키스트인 박열·이강훈과 함께 거류민단에서 통일운동을 하다가 1971년 7월 사망하였다.

1946년 7월 6일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 등 3의사의 대한민국 국민장이 광복 후 최초[당시는 미군정 시기였기 때문에 기록이 없고, 행정안전부 기록에는 국민장 1호로 백범 김구의 국민장이 기록되어 있다]로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백정기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육삼정 의거는 1923년 의열단의 황푸탄[黃浦灘] 의거,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와 더불어 중국 상하이에서 벌어진 ‘3대 의거’로 꼽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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