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697
한자 白貞基
영어공식명칭 Baek Jeonggi
이칭/별칭 용선(溶善),구파(鷗波)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6년 1월 19일연표보기 - 백정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4년 6월 - 백정기 재중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8년 2월 - 백정기 남화한인청년연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33년 3월 - 백정기 육삼정 의거 계획 실패로 일제 경찰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33년 11월 15일 - 백정기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34년 6월 5일연표보기 - 백정기 사망
출생지 신운리 -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
거주|이주지 은선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지도보기
활동지 상해 - 중국 상하이시
묘소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 - 서울특별시 용산구 임정로 26[효창동 255]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지역에 거주한 독립운동가.

[가계]

백정기(白貞基)[1896~1934]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자는 용선(溶善), 호는 구파(鷗波)이다. 아버지는 백남일(白南一)이고, 어머니는 윤문옥(尹文玉)이다. 부인은 조팔락(曺八洛)이고, 동생은 백진수(白珍守)이다.

[활동 사항]

백정기는 1896년 1월 19일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현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지금의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로 이주하였다. 삼례도찰방을 지낸 박만환(朴晩煥)[1849~1926]이 1903년에 설립한 영주정사(瀛州精舍)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이때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당시 호남 명문가의 자제들인 백관수(白寬洙)·김성수(金性洙) 등과 같이 공부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의 영학숙(英學塾)으로 옮겨 송진우(宋鎭禹)·김병로(金炳魯)·양태승(梁泰承) 등과 함께 신학문을 익혔다.

백정기는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에 내려와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박승규·최동규·김기홍 등과 함께 일본 천황을 암살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1923년 8월 초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사전 조사를 벌였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여의치 못하자 20일 만에 귀국하였다.

1924년 6월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재중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였고, 1925년 5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과 영국 자본가를 상대로 하는 상해 총파업을 주도하였다. 1928년 2월에는 상해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였다. 이후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과 연합하여 1931년 11월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였고, 항일구국연맹은 흑색공포단[BTP]의 모체가 되었다.

1933년 3월 17일 상해 공동조계에 있는 일본 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일본 정계·군사계 거물들과 중국 국민당 고관들의 회합이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였고, 정화암(鄭華岩)·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암살하려고 모의하였으나 거사 실행 직전 사전 정보 누설로 체포되어 의거는 실패하였다.

백정기는 일본 나가사키[長崎]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933년 11월 1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폭발물취체법」 위반, 살인 예비, 기물 파손 등의 혐의로 공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백정기는 모든 것을 자기가 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사형 구형에 무기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있던 중 1934년 6월 5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백정기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임정로 26[효창동 255]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백정기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04년 6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영원면 영원로 1049[은선리 928]에 구파백정기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기념관 내에는 백정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의열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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