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의현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15
한자 仁義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신태인읍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집필자 허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409년연표보기 - 인의현 폐지
관할 지역 인의현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신태인읍 지도보기

[정의]

고려 시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일대에 있었던 지방 행정 구역.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빈성현(斌城縣)은 본래 백제의 빈굴현(賓屈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인의현(仁義縣)이다”라는 기록이 나오며, 『고려사(高麗史)』에는 “인의현은 본래 백제의 빈굴현(賓屈縣)[부성현(賦城縣)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 때 이름을 무성(武城)으로 고치고, 대산군(大山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바꾸고, [고부군에] 내속(來屬)하였다. 대산감무(大山監務)가 겸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인의현은 본래 백제의 빈굴현이었는데[일명 부성현이라 한다], 신라에서 무성으로 고쳐서 태산군(太山郡)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에서 인의현으로 고쳤다. [태산군인의현] 모두 고부군의 임내(任內)로 삼아 태산군으로써 감무를 겸하게 하였고, 현종 10년(1019) 기미에 나누어 두 현으로 하였다. 본조 태종 9년(1409) 기축에 두 현을 합하여 태인(泰仁)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태인현 궁실 조에는 “정곤의 기에, ‘태인현은 곧 옛날의 태산과 인의 두 고을인데, 우리 조정에서 두 고을의 이름을 아울러서 태인이라 하였다. 읍내는 옛날 태산의 동쪽 구석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인의의 백성들이 왕래하는데 병통으로 여겼다. 병신년 가을 8월에 현감 황경돈(黃敬敦)이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 옛 객관을 현의 객관으로 삼았으나, 너무 좁고 누추하였다. 무술년 겨울에 오치선(吳致善)이 이어 와서 드디어 옛 객관의 서쪽에 지세를 살피고, 기해년 가을에 비로소 후청(後廳)·동서침(東西寢)·남청(南廳)·동서행랑(東西行廊)을 세우니, 모두 몇 칸이다. 신축년 여름에 안기(安起)가 오공(吳公)의 뜻을 이어받아 좌우랑(左右廊)·좌우마구[左右廐]·대문·고옥(庫屋)·향교·성전(聖殿)을 더 세우니, 모두 몇 칸이다.’ 하였다”라는 서술이 보인다.

[내용]

본래 백제의 빈굴현(賓屈縣) 또는 부성현(賦城縣)이라도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 때에 무성(武城)으로, 고려에 들어서서 인의현으로 고쳤다. 1019년(현종 10)에 태산현과 인의현의 두 현으로 나누었다고 하는데, 현종이 1011년 정월에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과정에서 인의현을 지나간 기록이 『고려사』 세가에 나타난다. 이로써 이전부터 인의현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의현의 치소와 관련하여 1936년 편찬된 『정읍군지』에서는 인의현의 치소가 정읍시 태인면과 백산면 구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의현에는 1106년(예종 원년) 4월 감무가 두어졌다. 권정평(權正平)[1085~1160]의 묘지명에 따르면, 권정평은 어시(御試)에 나아가 동진사 출신 제2인에 급제한 후에 관례에 따라 인의현감무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1376년(우왕 2) 9월과 1388년(창왕 즉위년) 6월에는 왜구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다.

[변천]

백제의 빈굴현[부성현]이라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 때에 무성(武城)으로 고쳐지고 대산군(大山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인의현으로 고쳐졌다. 1019년(현종 10년)에 두 현[태산군인의현]으로 나뉘었다가, 조선 시대 1409년(태종 9)에 다시 두 현이 합쳐져 태인현(泰仁縣)이 되었다. 인의현민들이 동쪽의 태산읍, 즉 칠보에 왕래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자, 1416년(태종 16) 8월에 현감 황경돈이 고을터를 중간 지점인 거산역,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거산리로 옮겼으나 고을 터가 좁아서 1418년(태종 18) 현감 오치선이 거산역에서 현재의 태인초등학교[정읍시 태인면 동헌길 16[태성리 429]]로 다시 옮기고 1419년(세종 1)에 현아의 건물을 세웠으며 1421년(세종 3)에 안기가 향교·성전(聖殿) 등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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