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현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36
한자 黃土峴戰鬪
이칭/별칭 황톳재 전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조광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4월 6일 - 황토현 전투 발발
종결 시기/일시 1894년 4월 7일 - 황토현 전투 종결
발생|시작 장소 황토현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하학리 56-1]지도보기
종결 장소 황토현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하학리 56-1]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전봉준|김개남|손화중|최경선

[정의]

1894년 4월 6일부터 4월 7일까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황토현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과 벌인 최초 전투이자 최대의 승리를 거둔 전투.

[개설]

황토현(黃土峴)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도계리 사이에 있다. 황토현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두승산천태산으로 이어지는 높이 35m의 낮은 언덕이다. 1894년 4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까지 황토현에서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과 보부상 연합 부대를 맞아 싸웠다. 1894년 4월 6일 정오 경에 전라도 태인[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일대]과 부안의 동학농민군이 도교산(道橋山)으로 집결하자 백산으로 출동하였던 전라감영군도 동학농민군의 뒤를 추격하였다. 이때 동학농민군이 황토현 맞은편 사시봉에 진을 치자 뒤를 쫓던 전라감영군은 4월 6일 해질 무렵 황토현에 이르러 진을 치고 머물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4월 6일 밤, 감영군이 공격하여 올 것을 예측하여 병력을 나누어 주위에 매복하고 진지를 비워 두었다. 예상대로 감영군과 보부상 부대는 어둠을 틈타 동학농민군 진지를 향하여 공격하였다. 이 순간 매복한 동학농민군들의 역습이 시작되었고 감영군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본진(本陣)을 향하여 도망쳤으나 매복하여 있던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받고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이어 동학농민군들은 여세를 모아 감영군의 황토현 본진을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역사적 배경]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농민 스스로가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일어선 민족 최대의 민중 항쟁이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주권을 수호하고 안으로는 부패 무능한 조선 왕조의 봉건 체제를 타파하여 국민 주권의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동학을 매개로 전봉준·김개남·서장옥·손화중 등 사회 변혁 세력은 최소한 1892년 삼례집회 때부터 강한 혁명의 의지를 지녔으며, 1893년에 있었던 사발통문 거사 계획 이전에 봉기에 대한 사전 논의가 있었으나, 시기를 놓고 의견이 달라 전봉준은 조병갑의 탐학과 관련하여 직접적 이해관계에 놓인 고부 농민들과 함께 1894년 1월 10일 고부농민봉기를 일으켜 사발통문 거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후 전봉준고부농민봉기가 한창 진행 중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1894년 2월 20일 경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전봉준과는 달리 혁명 의식으로 무장되지 못한 고부 농민들의 해산으로 말미암아 전봉준은 불가피하게 전라도 무장현(茂長縣)으로 달려가 손화중을 설득하여 3월 20일 경 무장(茂長) 당산(堂山)[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 집결한 후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고부로 향하였다. 동학농민군들은 고부관아를 재차 점령하였으며 3월 26일에 백산으로 본진을 옮겼다. 전라도 각지로부터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백산에서 전봉준·김개남·손화중은 동학농민군 지도부로 추대되고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여 민중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하였다.

[경과]

1894년(고종 31) 4월 1일 전주를 향해 진격하던 동학농민군이 태인을 점령하고 원평[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으로 진격하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동학농민군이 백산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각 관아의 군졸들을 모으는 한편 보부상 인력을 차출하여 전라감영군과 보부상으로 구성된 2,300여 명의 연합 부대를 백산으로 출동시켰다. 4월 3일 금구까지 진격하였던 동학농민군은 전라감영군이 동학농민군을 치러온다는 소문을 듣고 금구에서 후퇴하여 오후 6시 경 태인으로 와서 인곡, 북촌, 용산 등지에서 숙영하였다.

한편 백산에 모였던 일부 동학농민군이 부안으로 이동하여 부안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하동면(下東面) 분토동(分土洞)에 주둔하였다. 4월 3일에는 부안의 동학농민군들이 부안 동헌을 공격하여 현감을 구금하고 공형을 결박한 다음, 군기를 탈취하였다. 4월 4일 태인의 인곡, 북촌, 용산 지역에서 숙영한 동학농민군 가운데 일부는 부안으로 이동하고 일부는 태인에 계속 남아 있었다. 부안의 동학농민군들은 4월 6일 아침 8시경부터 부안을 빠져나오기 시작하여 고부의 도교산(道橋山)으로 향하였고, 태인에 남아 있던 동학농민군들도 4월 6일 밤 8시경에는 고부 도교산으로 이동하여 기존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였다.

백산으로 출동하였던 전라감영군도 그 뒤를 추격하였다. 이때 동학농민군이 황토현 맞은편에 위치한 사시봉에 진을 치자 뒤를 쫓던 전라감영군은 4월 6일 해질 무렵 황토현에 이르러 진을 치고 머물게 되었다. 전봉준은 이날 밤, 전라감영군이 어둠을 틈타 공격하여 올 것을 예측하여 병력을 나누어 주위 사방에 매복시켜 놓고 본진을 비워 두었다. 예상대로 전라감영군이 동학농민군 진지를 습격하였다. 이때 전라중군 김달관과 초관 이재섭이 공을 세우고자 깃발을 휘두르며 앞을 다투어 나가 공격하였지만 매복하였던 동학농민군들이 사방에서 공격하였다. 감영군들은 지리에 어두워 지척을 분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였으며 살아남은 병사들은 본진으로 도망쳤으나 또한 전날 백산에서 부안으로 이동하였던 동학농민군의 일부 부대가 매복해 있다가 공격하여 전멸을 시키다시피 하였다. 이어 동학농민군들은 여세를 모아 관군의 황토현 본진을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결과]

우영관 이경호는 병사를 이끌고 혼자서 진을 지켜 가슴에 총을 맞고 얼굴에 창을 찔려 사망하였으며 서기 이은승과 담양의 수성별장 국인묵도 함께 사망하였다. 태인의 전 감역인 유병직은 이미 행부보상의 반수였는데, 여러 상인들을 통솔하여 스스로 영관이 된 후 군대의 뒷전에 있다가 창과 칼에 찔려 사망하였으며 부상 도반수인 송병호 등 보부상들은 변변찮은 무기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하였다. 탄약 수송 임무를 담당한 신영대관 이재한과 유판근은 도망을 쳤고 교장 백찬경과 육용규 등도 도망하여 관군과 보부상 연합군은 크게 참패하였다. 한편 칠보의 고현내동에서는 유생 김기술을 중심으로 한 100여 명이 민보군[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지방 양반과 향리가 결성한 민간 군대 조직]을 조직하여 황토현으로 출전하였으나 4월 7일 새벽녘에 동학농민군의 기습을 받아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황토현 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기세가 높아진 동학농민군은 정읍, 흥덕, 고창, 무장을 비롯한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나아가 전주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황토현 전투는 전라감영군과 보부상, 유생으로 구성된 민보군의 연합 세력 대 동학농민군의 계급적, 의식적 투쟁이었다. 동학농민군이 거둔 황토현 전투의 첫 승전은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인 전쟁으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황토현동학농민혁명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황토현 전투 승리 이후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으며 승전 소식을 들은 각지의 민중들은 앞을 다투어 남진하는 동학농민군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렇듯 황토현 전투의 승리는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어 향후 동학농민혁명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반면에 전라·충청 일대의 지방 권력은 붕괴되었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홍계훈의 경군마저도 사기가 떨어져 감히 동학농민군과 싸우려 하지 못하였다. 황토현 전투는 동학농민군과 전제 왕권의 상징인 전라감영군이 최초로 물리적으로 격돌하였다는 상징의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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