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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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陳致萬 |
영어공식명칭 | Jin Chiman |
이칭/별칭 | 월정(月汀),진치만(陳治萬)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안후상 |
출생 시기/일시 | 1876년 7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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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진치만 대한독립의군부 가담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7월 7일 - 진치만 평안북도 신미도로 1년간 유폐 |
몰년 시기/일시 | 1925년 8월 7일![]() |
추모 시기/일시 | 1994년![]() |
추모 시기/일시 | 1998년 7월 - 항일애국의사진치만공적비 건립 |
출생지 | 영안마을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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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 | 홍성 - 충청남도 홍성군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진치만(陳致萬)[1876~1925]의 본관은 여양(驪陽)이며, 호는 월정(月汀)이다. 진치만(陳治萬)으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진치만은 1876년(고종 13) 7월 25일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 영안마을에서 태어났다. 기삼연(奇參衍)과 기우만(奇宇萬)에게 수학하였고, 을미의병 당시 기삼연·기우만 의진에 참여하였다. 1912년 국권 회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직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에 들어가 임병찬(林炳贊)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이용규(李容珪)·윤병일(尹炳日) 등과 함께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경 진치만은 이용규·김태영(金泰泳) 등과 함께 흠치교[보천교의 별칭]의 포교 방법을 활용하여 동지를 규합하였다. 진치만 등은 흠치교의 비밀 결사 조직에 몸담으며 고종의 칙명서[유명서라고도 함]와 마패를 이용하여 전국 각도의 애국지사들을 상대로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1917년 6월경에 흠치교의 비밀 결사 조직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고, 1917년 7월 7일 진치만 등 7명은 평안북도 신미도(身彌島)로 1년간 유폐[거주 제한]당하였다. 1918년 귀향한 진치만은 이용규 의진에 다시 가담하였다가 검거되어 1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정읍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도피 생활을 하였고, 1925년 8월 7일에 사망하였다.
[묘소]
진치만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진치만의 공적을 기려 199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8년 7월 여양 진씨 영안 문중에서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 255-1에 ‘항일애국지사 진치만 공적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