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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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漢鏞 |
영어공식명칭 | Song Hanyo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출생 시기/일시 | 1893년 9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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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6일 - 송한용 태인 3·1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15일 - 송한용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67년 6월 8일![]()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출생지 | 태창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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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 | 태인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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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송한용(宋漢鏞)[1893~1967]은 1893년 9월 18일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김현곤(金玹坤)·송수연(宋洙淵)·박지선(朴址宣)의 권유로 태인면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김현곤·송수연·박지선은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3·1운동을 목격한 뒤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내려와서 태인에서도 만세 운동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 주변 사람들과 접촉하여 뜻있는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송한용은 김현곤·송수연·박지선·송진상(宋鎭相)·오석흥(吳錫興)·송영근(宋榮根)·김진호(金鎭浩)·유치도(柳致道)·김순곤(金淳坤)·송덕봉(宋德奉)·김진근(金鎭根)·백복산(白福山)·김용안(金龍安)·최민식(崔民植)·김부곤(金富坤)과 함께 비밀 결사 15인회를 조직하고 태인 장날인 3월 16일을 거사일로 정한 뒤 각자 역할을 분담하였다. 송수연 등이 태극기 300매를 제작하였고, 당시 태인면사무소 서기이던 김현곤은 면사무소의 등사기를 이용하여 12일과 13일 밤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송한용 또한 동지들과 함께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며 시위 동참을 촉구하였다.
송한용 등은 1919년 3월 16일 사람이 많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정오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앞장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면사무소 부근에서부터 시작된 만세 행렬에 주변의 사람들이 호응하였고,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고 시위 행렬에 가담하였다. 수천 명으로 불어난 시위 군중은 곳곳에서 시위를 계속하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태인을 둘러싼 사방의 산꼭대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밤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 군중 가운데 일부는 기름을 묻힌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주재소 안으로 던지기도 하였다. 태인 3·1운동은 열흘 가까이 산발적으로 지속되었으며, 송한용을 비롯하여 80여 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송한용은 1919년 5월 1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고, 출옥한 뒤에는 정읍·영광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연락원 국창현(鞠昌鉉)에게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 나갔다. 송한용은 1967년 6월 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송한용의 공적을 기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