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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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車京石 |
영어공식명칭 | Cha Gyeongseok |
이칭/별칭 | 월곡(月谷),차윤홍(車輪洪),차천자(車天子)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안후상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지역에서 활동한 종교인이자 보천교 창시자.
[가계]
차경석(車京石)[1880~1936]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호는 월곡(月谷)이다. 본명은 차윤홍(車輪洪)이고, 자가 경석이다. 차천자(車天子)라고도 불렸다. 아버지는 차치구(車致九)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이다.
[활동 사항]
차경석은 1880년(고종 17) 6월 1일 전라도 고부군 부안면 연기동[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연기마을]에서 태어났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정읍의 접주였던 아버지 차치구(車致九)가 관군에게 붙잡혀 사망하자 차경석은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와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1899년 제2 동학농민전쟁으로 불리는 무술·기해농민봉기에 참여하였다가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차경석은 1905년 무렵 전라북도에서 진보회(進步會)와 일진회(一進會) 활동을 주도하였다. 한때 일진회 전라북도 임시 총대를 맡기도 하였던 차경석은 한때 손병희(孫秉熙)의 문명개화 노선을 따랐지만, 손병희가 천도교(天道敎)를 따로 차리면서 동학(東學)을 떠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1907년 6월에 강증산(姜甑山)을 만나면서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손병희의 문명개화론에 맞선 차경석은 토속성과 민족성이 다분한 강증산의 후천선경 사회 건설론을 제시하며 민중을 조직하였다.
강증산은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 있던 차경석의 집에서 세상의 새 질서를 계획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였고, 1908년 11월 차경석의 집을 포정소(布政所)로 정하고 천지공사를 마쳤다, 1909년 설날에는 차경석의 집에서 『현무경(玄武經)』을 남겼다. 강증산이 사망한 뒤 차경석은 포교 활동을 통하여 교인들을 다시 조직하였고, 사람들은 이를 ‘선도교(仙道敎)’ 또는 ‘태을교(太乙敎)’라고 불렀다. 선도교는 비밀리에 집회를 갖고서 후천 선경 사회를 맞이하기 위한 주송 수련에 진력하였으며, 일본의 패망을 예언하고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선도교를 예의주시하면서 차경석과 일부 간부들을 수배하거나 검거하였다. 차경석은 1916년에 24방주제로 전국의 교인을 조직하였으며, 1919년 10월에는 경상남도 함양의 대황산(大篁山)에서 24방주제를 60방주제로 확대 개편하는 고천제(告天祭)를 거행하였다.
1921년 9월에는 경상남도 함양의 황석산(黃石山) 고천제에서 국호를 ‘시(時)’, 교명을 ‘보화(普化)’라고 천명하였다. 1922년 1월에는 경성 창신동에 ‘보천교경성진정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어 보천교(普天敎)라는 교명과 교단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황석산 고천제 이후 교단 안팎에서는 차경석이 천자(天子)로 등극할 것이라는 갑자년[1924년] 등극설이 널리 유포되었고, 보천교는 당시 일간지 『시대일보』를 인수하고 잡지 『보광』을 창간하는 등 사회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보천교는 1923년에 물산장려운동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형평 운동과 민족의 독립운동에도 깊이 개입하였다. 임규(林圭)는 차경석으로부터 받은 독립운동 자금 5만 원을 나용균(羅容均)을 통하여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였고, 만주의 김좌진(金佐鎭)에게도 보천교의 교금 5만 원이 지원되었다. 당시 임규·박자혜(朴慈惠)·주익(朱翼)·조만식(趙晩植) 등 민족운동가들이 보천교에서 교직(敎職)을 맡기도 하였다. 민족운동가들의 보천교 자금 활용 시도를 수상하게 여긴 일제는 보천교 교단 간부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고, 1925년 보천교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친일 단체로 해석할 수 있는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였다. 당시 국내 청년 지식인들은 보천교 박멸 운동을 전개하면서 계몽을 선으로 보천교를 악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계몽 또는 문명이 아닌 것은 야만 또는 악이며, 그 야만 또는 악의 상징이 보천교라는 이분법이 당시 횡횡하였다.
1929년 4월에 성전인 십일전(十一殿)이 완공되고 십일전 주변에 기와집 50여 채가 지어져 보천교 중앙본소가 꾸려졌다. 이후 십일전 낙성식 겸 삼광영 봉안식이 천자 등극식이라는 풍설로 확산되자, 일제는 낙성식 행사를 무력으로 저지하였다. 이처럼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과 회유, 그리고 교단 내 여러 차례의 혁신 운동으로 인한 교인들의 배교와 탈교 등은 보천교를 지리멸렬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교와 보천교계 신종교들은 비밀리에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고 기원하는 등의 후천선경 신국가 건설 운동을 지속하였다.
차경석은 1936년 3월 10일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광복 이후 차경석의 영위 봉안 건을 두고서 보천교가 신·구파로 갈려 우여곡절을 겪었다. 결국 구파가 정화사(井華祠)에 ‘보천대화대도중앙월곡성사(普天大化大道中央月谷聖師)’라고 적힌 위패를 안치하였다.
[사상과 저술]
차경석은 별도의 저술을 남기지 않았으며, 교단사 『보천교연혁사』와 차경석의 어록 『대도지남(大道指南)』 등은 제자들이 차경석 사후에 발간하였다. 1945년 광복 이전 교단에서 발간한 자료는 『보천교보』 1호[1922]와 『보광』[1923] 등이 있다. 광복 직후에는 『이사전서(二師全書)』[1946], 『보천교연혁사』 상·하[1948], 『이사전서(二師傳書)』 1권[1948], 『보천교』[1951], 『예기촬요(禮記撮要)』[1953], 『집지훈사(執贄訓辭)』 건·곤[1956], 『보천교연혁사(속)』[1958], 『연진(硏眞)』 1호[1958], 『연진』 2호[1959] 등을 발간하였다. 이 외에 『보천교지』[1964], 『시감(時鑑)』[1984], 『도훈(道訓)』[1987], 『보천교내정원연혁사』, 『교조약사』[1935], 『유장록(由章錄)』 등이 발간되었다.
[묘소]
차경석의 묘소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상교동 신구마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