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8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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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考巖書院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모촌길 48-17[하모동 37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동희 |
건립 시기/일시 | 169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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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1년![]()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91년![]() |
현 소재지 | 고암서원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모촌길 48-17[하모동 378]![]() |
성격 | 서원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하모동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개설]
고암서원(考巖書院)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주벽으로 1695년(숙종 21) 창건된 사액 서원(賜額 書院)이며, 후에 수제자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를 추배하였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붕당 정치의 핵심 인물로 우의정을 지냈다. 1689년(숙종 15)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경종]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것에 반대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국문차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다가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송시열의 나이 83세 때이다. 송시열이 사약을 받은 자리에는 ‘송우암 수명 유허비(宋尤庵 受命 遺墟碑)’가 서 있다. 송시열은 1694년(숙종 20)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복권되었다.
[위치]
고암서원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모촌길 48-17[하모동 378]에 있다. 모촌마을 앞으로 모천(茅川)[천원천]이 흐르고 너른 들녘이 펼쳐져 있으며 고속국도 제25호가 지난다. 모촌교(茅村橋)를 지나 좌측으로 꺾으면 ‘모촌마을’ 이정표가 있고 우측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길을 따라 들어가 모촌경로당 못 미쳐서 우측으로 꺾어 들어가면 고암서원이 나온다. 서원은 마을 가운데에 있으며, 마을 꼭대기에는 단군성전이 있다.
[변천]
고암서원은 송시열이 사약을 받은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1695년 서원을 건립하고 ‘고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1785년(정조 9) 권상하를 추배하였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대통을 이은 학자로 좌의정에 올랐으나 나가지 않았다. 고암서원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훼철령 때 헐리고 묘정비만 남아 있었다. 1991년 유림들이 뜻을 모으고 정읍시가 지원하여 복설하였다.
[형태]
고암서원은 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강당이 나온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건물 왼쪽에 석전 황욱이 쓴 ‘고암서원’ 편액이 있고, 오른쪽에는 ‘명정재(明正齋)’ 편액이 걸려 있다. 강당 앞에는 수직사가 있다. 강당 뒤 삼문을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사당이 있다. 사당 당호는 없으며, 한가운데 송시열의 위패가 있고, 측면에 권상하의 위패가 있다. 강당 앞마당 오른쪽에 1747년(영조 23) 좌참찬 이재(李縡)가 지은 고암서원 묘정비(考巖書院 廟庭碑)가 있다. 묘정비 옆으로 ‘고암서원비’라고 새긴 작은 비가 있다. 석질이 좋지 않고 마모가 심한데, 서원의 내력을 담은 비로 보인다. 사당 건물 뒷편에 ‘고암(考巖)’, ‘병인 9월’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현황]
고암서원 묘정비는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비교적 보존 관리가 잘 되고 있으나 고암서원 자체는 이정표가 없어 찾아가기 어렵다.
[의의와 평가]
고암서원은 사액 서원으로 붕당 정치사를 담은 매우 가치가 큰 문화유산이다. 고암서원과 송우암 수명 유허비를 연계하여 관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