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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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泌陽祠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14-10[무성리 31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류호석 |
건립 시기/일시 | 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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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05년 11월 9일![]() |
개축|증축 시기/일시 | 2009년 7월 11일 - 필양사 외삼문 중건 |
현 소재지 | 필양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14-10[무성리 313]![]() |
성격 | 사우 |
양식 | 목조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관리자 | 필양사보존회 |
문화재 지정 번호 | 정읍시 향토문화유산 제2호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애국지사 김영상을 제향하는 사우.
[개설]
필양사(泌陽祠)는 1945년 정읍 지역의 유림들이 한말 유학자이자 애국지사인 김영상(金永相)[1836~1911]의 항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에 건립한 사우이다. 김영상은 자가 승여(昇如), 호는 춘우정(春雨亭)·오계(鰲溪)이며, 초명은 김영조(金永朝)이다. 본관은 도강(道康)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우면 산북리에서 태어났으며, 16세 때 칠보면 무성리 원촌으로 이사하였다. 소휘면(蘇輝冕)의 문인이며, 기정진(奇正鎭), 전우(田愚), 송병선(宋秉璿) 등과도 교유하였다.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에는 항일 운동에 전념하였다. 1910년 일본이 강제로 한국을 병합한 뒤에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을 주면서 한국의 지식인들을 회유하려고 하였는데, 김영상은 단호하게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이 적힌 사령서를 찢어 버렸다. 이 때문에 김영상은 불경죄로 일본 헌병에게 연행되어 이송 도중 김제 만경강 신창진(新倉津) 나루터에 이르러 자신의 의대(衣帶)에 절명사(絶命詞)를 쓰고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본 헌병에게 제지당하고 이후 군산감옥에 수감되었으나 8일간 단식 끝에 1911년 5월 9일 76세에 순절하였다. 1978년 지역 인사들의 발의로 신창진 나루터인 김제군 청하면 동지산리에 김영상을 기리는 순절 추모비를 세웠다. 김영상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필양사는 2005년 11월 9일 정읍시 향토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필양사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14-10[무성리 313]에 있다. 태산선비문화사료관에서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으며, 오른쪽 옆에는 김약회(金若晦)가 낙향하여 1520년경 건립한 한정(閒亭)이 있다.
[형태]
필양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목조 건물이다. 사우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외삼문은 2009년 7월 11일[윤5월 19일] 중건되었다. 사당의 한쪽에는 애국지사 춘우정김영상선생 순국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현황]
필양사는 한때 사우가 방치되어 목재 바닥이 썩고 지붕이 새기도 하였으나, 2005년 11월 9일 정읍시 향토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되고 인근의 정읍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태산선비문화권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주변 일대가 정리되었다. 현재는 필양사보존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2023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 시설로 지정되어 전북서부보훈지청이 관할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