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970 |
---|---|
한자 | 楚山音律會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상사1길 28-11[상동 662-5]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현 |
설립 시기/일시 | 1954년 9월 18일![]() |
---|---|
해체 시기/일시 | 1969년![]() |
설립 시기/일시 | 1978년![]() |
개칭 시기/일시 | 1992년![]() |
현 소재지 | 초산음률회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상사1길 28-11[상동 662-5]![]() |
성격 | 예술 단체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상동에 있는 율객들의 모임.
[개설]
초산음률회는 풍류 명인들이 산속의 정자에 모여 풍류를 즐겼던 모임이었던 초산율계에서 출발한다. 당시 정읍 인근의 율객들을 모아 계를 조직하고 정읍의 옛 이름 ‘초산’을 붙여 초산율계라 명명하였다. 초기 설립 목적 및 취지의 변동 없이 꾸준히 향제 풍류의 전통을 이어 가고 있는 정읍 지역의 유서 깊은 단체이다.
[설립 목적]
초산음률회는 정읍의 우수한 전통문화 중 하나인 풍류를 계승·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변천]
초산율계는 1954년 9월 18일 조직되었다. 창립 회원은 김용근, 김영관, 박홍규, 김진술, 박주양, 나금철, 김홍진, 정경태, 이기열, 유종구, 나용주였으며, 회장은 김용근[거문고]이었고, 부회장은 나금철[가야금]이었다. 봄과 가을에 열리는 모임에서 입회비를 내고 신입회원을 받았는데, 1955년 3월 임기하, 은회상, 진상돈, 황면주, 박득봉이 입회하였고, 1955년 가을에는 송기동, 정상연이 입회하였다. 1956년 가을에는 이귀남, 김동문, 차인환, 홍순옥이 입회하였다. 1957년 황상규가 새로 입회하였고, 1959년 허현이 입회하였으며, 1962년 가을 김환철이 입회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1966년 이후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었다. 1969년에 이르러 해산하였다.
1978년 인근의 율객들이 모여 다시 초산율계를 만드는데, 참여한 이들 대부분이 이기열의 제자들과 성내 김제 율객들이었으며, 후에 김환철의 제자들이 참여하였다. 1980년대 들어 김영수, 진철호, 김문선 등 젊은이들이 참여하면서 활기를 띠게 되는데, 모두 김환철의 제자로 대금을 불었다.
1992년 이기열이 회장을 맡으면서 초산율계는 명칭을 초산음률회로 바꾸었다. 뛰어난 문화유산급 명인들이 한 명씩 사망함에 따라 남은 회원들은 정읍정악원에서 매월 둘째 일요일에 함께 연습을 하였다. 2023년 현재 초산음률회는 매월 둘째 주 토요일 정읍문화원에서 모여 연습을 하고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92년 초산율계에서 초산음률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몇몇 악사들을 보강하여 꾸준히 연습을 하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004년 9월 창립 50주년 정악 발표회를 가졌고, 2014년 9월 창립 60주년 기념 발표회를 성대하게 진행하며 많은 풍류 애호가들의 격려와 호응을 받았다.
또한 2019년 문화 소외 지역으로 찾아가 공연하는 ‘정읍문화원과 함께 하는 풍류 여행’에 참여하여 정읍시 고부면 상만 마을회관에서 주민을 대상으로 공연하였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면 공연이 어려워지자 2020~2021년에는 1991년 작고하기 직전까지 초산율계 계장으로 활동하였던 대금 정악 무형유산 고(故) 김환철의 공적비가 있는 부안 김씨 재실에서 공연하였고, 공연 영상을 정읍문화원 유튜브에 게재하여 전국적으로 홍보하기도 하였다. 2022년 정읍문화원 제58회 창립 기념 ‘정읍 문화 가족의 날’ 공연에서는 초산음률회 연주에 맞춰 하얀 천 위에 그려지는 「상춘곡」을 선보여 시민들에 벅찬 감동을 안겨 주었다. 2023년 현재도 정읍 지역의 문화 예술 행사에 참여하여 시민들에게 정읍 고유의 풍류 문화를 전하고 있다.
[현황]
2023년 현재 초산음률회는 회장 나종민, 총무 김영언, 감사 권민정을 포함한 회원 12명이 활동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초산음률회는 다른 지역 율계가 해체의 길에 들어선 이후 시작되었으면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보임과 동시에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정읍을 풍류의 고장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