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남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1278
한자 開男謠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성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 시기/일시 1985년 3월 - 「개남요」 김환옥에게 채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9년 - 「개남요」 『전북의 민요』에 수록
채록지 지금실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지도보기
가창권역 정읍시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성격 민요|참요
가창자/시연자 김환옥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에서 전승되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참요.

[개설]

「개남요」동학농민혁명 당시 핵심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김개남(金開南)[1853~1894]의 체포와 처형의 역사를 담고 있는 참요(讖謠)이다.

[채록/수집 상황]

정읍시 산외면에 전승되는 「개남요」는 1985년 3월에 김익두, 서홍관이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개남의 손자 김환옥[남, 69세]에게 채록하였다. 1989년 전북애향운동본부에서 발행한 『전북의 민요』에 수록되었다.

[구성 및 형식]

「개남요」는 일명 「파랑새요」의 악곡에 김개남이 효수된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민중들의 상실감, 낭패감을 담은 가사를 붙여 부른다. 「개남요」를 채록한 산외면 동곡리의 지금실은 김개남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내용]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은 도강 김씨(道康 金氏) 집성촌이면서 김개남의 고향 마을이다. 김개남은 1894년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이자 혁명가이다. 1894년 김개남은 청주성 일대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한 뒤 충청도 연산 일대에서 전봉준 부대와 합류하여 함께 전라도 쪽으로 후퇴하였다. 김개남은 전주까지 전봉준과 동행하였으나 1894년 11월 23일 전주에서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김개남은 1894년 12월 1일 산내면 종성리에서 추적하여 온 강화병, 황헌주, 박승규가 이끄는 관군과 포교에게 체포된다.

「개남요」김개남이 체포된 후 ‘짚둥우리’를 쓰고 압송되는 장면을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가사로 묘사하고 있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억만 군사 어따 두고/ 집둥우리가 웬말이냐”

[현황]

전주 남쪽에 있는 산인 완산칠봉(完山七峰)에서 동북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전주천 변에는 초록바위가 있다. 조선 시대 죄인을 효수하던 곳인데, 특히 조선 후기에 천주교 신자들을 많이 처형하였다. 김개남의 전투력과 혁명 의지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전라도관찰사 이도재(李道宰)[1848~1909]는 김개남을 서울로 압송하지 않고 재판도 없이 1894년 12월 13일 초록바위에서 참수하였다.

[의의와 평가]

삼정문란(三政紊亂)과 지방관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 수탈에 못 이겨 봉기한 농민들은 결국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패퇴한다. 이후 일본군은 동학군을 끝까지 추격하고 샅샅이 뒤지면서 학살을 자행하였다. 결사항전으로 대응하였지만 처참한 패배로 귀결된 동학농민군을 지켜본 당시 민중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개남요」, 「파랑새요」 등의 참요 방식으로 퍼져 나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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