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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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女性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재영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에서 전개된 여성 교육 운동.
[역사적 배경]
구한말 근대 교육과 더불어 시작되었던 야학 운동은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1920년 정규 학교의 취학률은 학령 아동을 약 228만 3670명으로 추정할 때, 10만 7365명만 재학할 정도여서 4.7%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초등 교육 기관의 입학난을 가중시켰다. 입학난을 해결하는 방안은 사립 학교 설립이나 야학의 활성화밖에 없었다.
[경과]
여자[부인] 야학은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정읍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읍의 여자 야학 역시 설립 연대가 늦고 활발하지 못하였다. 여자 야학의 설립 주체는 기독교 단체와 지역 내 유지들이었다. 정읍 지역에는 1924년 2월 기독교 교회 임원들이 조직한 여자야학회가 있었고, 1926년 9월에는 정읍시 북면 마정리의 지역 유지들이 일반 상식을 보급할 목적으로 남녀 30명을 대상으로 노동 야학을 설치하였다.
1927년 2월에는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의 여자 유지들이 역시 부녀자 10명을 대상으로 일반 상식을 보급할 목적으로 부녀야학회를 조직하였다. 태인청년회에서는 1927년 2월 25일부터 부녀야학을 개최하였다. 이후 야학에 관한 기사는 1930년대에 나타나나, 이는 친일 성격의 단체에서 운영하던 것이었다. 1939년 결성된 정읍여자청년단이 바로 그것이다. 정읍여자청년단은 15세 이상 25세 이하의 신체 건강하고 사상이 온전한 부녀자를 단원으로 한정하였다. 당시 정읍여자청년단을 이끌던 단장은 일본인이었으며, 단원은 약 70명 정도에 이르렀다.
[의의와 평가]
야학은 초등 교육 기관을 대체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으며 여자 야학은 정규 학교에 취학하기가 힘들었던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