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04
한자 近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재영

[정의]

1894년 동학농민혁명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전까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의 역사.

[동학농민혁명]

1894년 1월 10일 전라북도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중국의 태평천국운동, 인도의 세포이 항쟁과 더불어 19세기 아시아 3대 농민 전쟁의 하나로 꼽힌다. 동학농민혁명은 반외세, 반침략의 민족 운동으로 이후 한말 의병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으로 그 정신이 이어졌다.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민중이 ‘역사 발전의 주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농민군이 집강소(執綱所)를 통하여 농민 자치를 실현한 것은 바로 역사 발전의 주체로서 민중의 역할을 보여 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반봉건적인 사회 개혁을 지향하였으며 반침략과 반외세를 분명히 하였다. 이로써 한국 근대사의 방향이 결정되고 민족 운동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영주정사]

근대 민족 교육의 구심점 역할을 한 곳이 바로 박만환(朴晩煥)이 1903년 흑암동에 세운 영주정사였다. 영주정사는 당시 호남 지역 구학문을 대표하는 곳이었다. 백정기 의사를 비롯한 인촌 김성수, 근촌 백관수 등 당대 호남 지역 부호의 자제들이 영주정사라는 교육 기관을 통하여 교유하고 인맥을 형성하였다. 영주정사에서 출판된 교재 가운데는 여성을 교육하고자 별도의 교재가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간재의 제자였던 유영선(柳永善)이 어린 딸을 교육하기 위하여 지은 『규범요감(閨範要鑑)』도 이 같은 박만환의 여성 교육에 영향을 입은 바 컸을 것이다. 이 밖에도 박만환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파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직전에는 재부임하는 조병갑의 축출 자금을 출연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의친왕 이강의 중국 망명 자금을 내놓기도 하였다.

박만환의 아들 박승규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근대학교인 승동학교(升東學校)를 설립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하였다. 한편으로는 면암 최익현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아나키스트 백정기 의사의 항일 무장 투쟁을 돕기도 하였다. 일본 천왕을 암살할 목적으로 소유 토지를 근저당 설정하여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태인의병]

1906년 면암 최익현이 주도한 무성서원의 태인의병[병오창의(丙午倡義)]은 상소 운동에서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일어난 을미의병과 달리 국권 회복을 위하여 일어난 항일 의병이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태인의병은 을사늑약 후 호남 지방에서는 최초로 일어난 항일 의병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최익현이 거의함으로써 여타 지역 의병 봉기에 큰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국채보상운동]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경우, 전라북도에서 참가자 수와 의연금 액수가 가장 많은 곳이 정읍이었다. 정읍 지역 발기인 가운데 전현직 하급 관리들이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정읍단연동맹회의 발기인인 박중현(朴仲炫)이 전의관이었고, 박기철(朴箕哲)이 전문안 출신이었다. 중추원전의관 박중현은 독립의군부에도 참가하였으며. 진사 박기철은 장명리에 사립 초남학교(楚南學校)를 설립하였다. 모두 장명동에 살던 태안 박씨들이었다. 시장에서는 상인들이 상점별로 많은 의연을 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과 파리장서]

1919년 2·8독립선언, 3·1운동, 한국유림단 파리장서사건 등은 모두 정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8독립선언에 백봉 나용균(羅容均)이 배후에서 거사 자금을 조달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였고, 3·1운동에서는 박준승(朴準承)[1865~1927]이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파리장서사건에는 면암학파인 김양수(金陽洙)가 서명하였으며, 보천교에서는 5만 원[현 시가 20억 원 추산]의 군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일제 강점기 정읍 지역의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

1920년 8월 정읍노동공제회에서는 전국 최초로 ‘소작인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소비조합 운동’을 병행하였다. 1925년 4월 태인노농회에서는 ‘소작권 이동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5년 10월 화호노동친목회에서는 ‘소작료 인하 운동’을 전개하였다. 농민 운동의 경우, 1920년대 전반에는 한국인 지주를 대상으로 소작권 이동 반대 운동을, 후반에는 일인 지주를 대상으로 한 소작쟁의를 전개하였다. 1927년 4월 신태인읍 화호리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일본인 이민촌에서 소작쟁의가 있었고, 구마모토[熊本]농장에서도 1930년대에 소작쟁의가 4차례나 발생하였다. 당시 구마모토의 소유지는 정읍을 비롯한 김제, 옥구 등지의 5개 군 26개 면에 걸쳐 있었다. 구마모토는 토지 소유 전국 7위에 전라북도에서는 동척 다음으로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구마모토농장은 일제 강점기 농업 경영의 선진성과 수탈성이 가장 강하였다. 특히 증산 목표치를 미리 정한 후에 인상된 소작료를 징수하는 악랄한 방식을 취하였다. 농민들은 소작료 불납동맹을 결성하여 대규모 투쟁을 벌였다. 그럼에도 화호지장(禾湖支場) 쟁의는 1937년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구마모토농장의 사업장이 많았음에도 유독 화호에서 대규모 소작쟁의가 장기간 지속된 이유는 신태인 지역의 경우 일찍부터 각종 사상 단체와 연결된 농민 운동, 노동 운동 단체가 활동하여 왔기 때문이다. 한편, 1926년 3월경에는 이평농조가 조직되었다. 1928년 4월에는 산외면에 합법 농조가 조직되었다. 이어서 전라북도 정읍군 용북면 삼천리[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신태인읍 신태인리]에도 소작쟁의 과정에서 농조가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비록, 군 단위의 통일된 조직을 건설하지는 못하였으나 정읍 지역의 농조 운동은 전북의 다른 군에 비하여 활발한 편이었다. 1931년 11월 초 정읍, 이평, 산외, 감곡, 정토, 용북 지역 활동가 30여 명은 ‘독서회 및 적농 조직 혐의’로 대거 검거되었으며, 이로써 정읍 지역 합법 농조 운동은 소멸되었다.

[형평 운동]

백정들의 신분 차별 철폐를 위한 형평 운동(衡平 運動)도 전개되었다. 정읍 형평분사는 1923년 5월 23일 전북에서 네 번째로 창립되었다. 하지만 백정들의 경제 활동에 관한 내용이 주로 토의되었을 뿐 인권 운동에 대한 내용이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형평운동의 1차 목적이 백정들에 대한 차별 대우 철폐임을 생각할 때 이는 달리 해석되어야 할 부분이다. 아마도 백정들의 직업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가난을 면치 못하였던 것이 호남 지역 백정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 철폐를 위한 인권 운동보다 경제 투쟁이 우선시되었을 것이다. 경제 투쟁은 운동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서라도 필요한 투쟁이었다.

[6·10만세운동과 이동환]

1926년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출신 이동환(李東煥)이었다. 6·10만세운동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통합되어 1927년 신간회 결성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함으로써 민족유일당 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927년 3월 25일 공판이 열렸다. 1심에서 검사가 “한강이 역류할지언정 조선 독립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자 이동환은 “한국이 당장에 독립은 안 된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에게 민족정신을 앙양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고자 하였다”라고 당당히 말하였다. 식민 통치의 상징인 총독부를 폭파하고 일인들을 폭살하고자 하였던 이동환의 거사는 당시로서는 실행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것이었다. 하지만, 실행 여부를 떠나 그러한 발언이나 계획은 학생운동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 통치하의 우리 민족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놀라운 일이다.

[신간회와 광주학생항일운동]

1927년 신간회 정읍지회는 함경북도 나남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조직되었다. 호남 최초의 목사이자 형평 운동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던 최중진(崔重珍) 목사와 민족주의자 이익겸(李益謙) 등이 관여하였지만 당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인 면에서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에는 정읍농업학교에서 ‘동맹휴학 사건’이 있었고, 심지어 초등학교에서조차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낙서를 하였다 하여 해당 학교장과 어린 학생들이 문초를 당하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육삼정 의거]

독립운동의 경우,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으나 아나키스트 백정기 의사의 ‘육삼정(六三亭) 의거’는 주목할 만하다. 백 의사는 이봉창, 윤봉길과 함께 3의사로 불리며 이준,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과 함께 5열사로 불리기도 한다. 육삼정 의거는 의열단원 김익상의 황푸탄 의거[1923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紅口] 공원 의거[1932년]와 더불어 중국 상하이에서 벌어진 ‘3대 의거’로 꼽기도 한다. 백정기의 유해가 현재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백 의사와 같이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던 김제 출신 정화암의 회고록에는 1932년 윤봉길의 상해 훙커우 공원 의거와 별도로 독자적인 투탄 계획을 세운 바 있으나, 입장권을 구하지 못하여 실패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백정기 의사는 1933년 3월 중국 상하이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는 일본 요정 육삼정에서 일본 정계와 군사계 거물, 중국 국민당 고관들의 회합이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참석자 중에는 일본 육군대장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와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933년 3월 17일 정화암,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등과 같이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려고 모의하였으나, 일본인 오키의 사전 정보 누설로 안타깝게 의거는 실패하였다. 1946년 7월 6일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의 장례가 대한민국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해방 이후 최초의 국민장이었다. 1963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보천교의 독립운동]

종교적으로는 동학의 이념을 계승한 강일순의 증산 종교 운동이 있었다. 증산 사상을 이은 것이 바로 차월곡[본명 차경석]의 보천교였다. 차월곡의 아버지 차치구는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전 과정에 참여한 지도자였으며, 반드시 아들인 차경석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보천교에서 전개한 민족운동은 그 뿌리가 동학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천교에서 상해임시정부에 나용균(羅容均)을 통하여 5만 원을 전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22년에는 세계약소민족회의에 참가하는 민족 대표들에게 1만 원의 여비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김좌진에게 5만 원의 군자금을 제공하여 무장대의 편성을 가능케 하였다는 점이다. 이로써 김좌진 부대의 무장 투쟁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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