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572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신은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가창권역 정읍시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서 전승되고 있는 고유 민속 성악.

[개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서 전승되는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가 서사적 구조의 긴 이야기를 엮어 가며 연행하는 민속악이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에 한강 이남 지역인 경기 남부와 충청남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태동하였다. 정읍 역시 판소리가 활발하게 소비되던 지역이며, 정읍 출신이거나 정읍을 지역 기반으로 하는 많은 소리꾼들이 활동하였다. 정읍예기조합(井邑藝妓組合)과 정읍국악원을 매개로 하여 전국 각지의 소리꾼들이 정읍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구성 및 형식]

정읍 지역의 판소리 전통은 ‘후기 팔명창[19세기 중반에서 말기까지 활약한 여덟 명의 판소리 명창]’ 중의 한 사람인 박만순(朴萬順)[1830~1898]으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박만순은 처음 주덕기(朱德基)[?~?]에게 소리를 배웠고, 이후 송흥록(宋興祿)[1801~1863]의 수제자가 되었다. 송흥록 문하에서 「춘향가(春香歌)」 중 「옥중가(獄中歌)」를 배우고 전라도관찰사가 집무하던 전주 선화당(宣化堂)에서 소리하여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박만순의 장기는 「춘향가」 중 「사랑가」와 「옥중가」, 「적벽가(赤壁歌)」 중 「황룡도」와 「장판교대전(長坂橋大戰)」 등이었다. 정노식(鄭魯湜)[1891~1965]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는 「옥중가」 중 ‘춘향 몽유 대목’이 박만순의 더늠으로 실려 있다. 박만순의 소리는 전도성(全道成)[1864~?]에게 이어졌다.

전도성은 1864년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관촌면 병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아버지 전명준(全明俊)에게 소리 공부를 시작하고, 28세 때 송우룡(宋雨龍)[1835~1897] 문하에서 판소리의 방향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박만순, 김세종(金世宗)[1835~1906], 이날치(李捺治)[1820~1892] 등으로부터 견문을 넓혔고, 특히 박만순을 3년간 따라다니면서 소리를 익혔다고 한다. 전도성은 특히 판소리의 역사와 이론에 밝았고 비평에 있어서도 당시 일인자로 인정받았는데, 이는 전도성의 증언에 기반하여 저술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그대로 드러난다. 전도성은 고종(高宗) 앞에서 소리를 한 어전명창(御殿名唱)으로 참봉 벼슬을 받았으며, 판소리의 세속화를 반대하여 협률사(協律社)에 참여하지 않았고, 음반 취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도성의 제자로는 신영채(申永彩)[1915~?]와 김원술(金洹述)[1921~?]이 있다.

정읍예기조합[권번(券番)]은 1928년경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해방 전에 정읍예기조합에서 소리 선생을 한 것으로 확인되는 사람은 유성준(劉成俊)[1873~1944], 조몽실(曹夢實)[1900~1949], 신영채, 이기권(李基權)[1905~1951] 등이며, 시기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운학, 김준섭(金俊燮)[1913~1968] 등도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정읍예기조합의 소리 선생으로 있었다고 한다. 정읍예기조합은 1948년 정읍국악원으로 개칭되었고, 정읍국악원에서 활동한 바 있는 소리꾼들로는 임옥돌(林玉乭)[1902~1947], 공대일(孔大一)[1911~1990], 안기선(安基善)[1904~?], 서동순[1910~1982], 김성수(金性洙)[1929~1993], 김홍남, 한승호(韓承鎬)[1924~2010], 최난수(崔欄洙)[1931~2013], 홍정택(洪貞澤)[1921~2012], 최광렬, 박홍남(朴弘南)[1920~2006], 박봉남, 임준옥[1928~1987], 성옥란(成玉蘭) 등이 있다. 20세기 후반 정읍 출신 및 정읍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소리꾼으로는 은희진(殷熙珍)[1947~2000], 강광례(姜光禮)[1933-2012], 김명신(金明信)[1946~2023]을 꼽을 수 있다.

정읍은 판소리뿐 아니라 고법(鼓法) 전통도 뛰어난데, 전도성의 수행 고수였던 전계문으로까지 소급될 수 있고, 전계문의 북가락은 박홍규, 박창을, 권재남 등에게 이어졌다. 박홍규는 정읍예기조합 시절 총무를 맡아 운영하였고, 박창을은 전주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함으로서 전계문의 북가락을 널리 보급하는 데 공헌하였다. 권재남은 고수로서의 활동은 많이 하지 않았으나, 판소리 애호가로서 정읍 지역 고법의 이론화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박창을은 송영주, 김판철, 송일섭, 주봉신 등의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김동준(金東俊)[1928~1990]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

20세기 후반 정읍 출신 및 정읍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소리꾼으로는 은희진, 강광례, 김명신을 꼽을 수 있다. 은희진은 정읍군 영원면[현 정읍시 영원면] 출신으로 어렸을 때 광주의 오천수(吳天洙)에게 판소리 공부를 시작하고, 박봉술(朴奉述)[1922~1989]에게 「적벽가」를 배웠다. 은희진은 22세부터 27세까지 정읍국악원 강사로 재직하였고, 1976년 국립창극단(國立唱劇團) 단원으로 발탁된 후에도 꾸준히 소리를 익혀 성우향(成又香)[1935~2014]에게 「춘향가」를 배우고, 오정숙(吳貞淑)[1935~2008]에게 「흥보가」를 배웠으며, 조상현(趙相賢)[1939~ ]에게 「심청가(沈淸歌)」를 이어받는 등 다양한 소리를 습득하였다. 남원춘향제 전국명창대회에서 장원을 수상하였고,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전수 교육 보조자로 인정되며 동초제(東超制)를 이을 남자 명창으로 주목 받았으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타계하기 전까지 전라북도립국악원[현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예술 감독으로 재직하였다.

강광례는 전라남도 강진 출신이지만 1969년부터 정읍국악원, 1995년부터 정읍사국악원에서 판소리를 가르치며 제자를 양성하였고, 1983년부터 판소리보존회 정읍지부장을 맡아 활동하며 정읍 판소리의 부흥을 위하여 힘썼다. 전주의 김원술과 김동준에게 처음 소리를 배우고, 남원의 김영운과 광주의 정광수(丁珖秀)[1909~2003]에게도 소리를 배웠으며, 군산의 최난수로부터 본격적으로 「수궁가」와 「흥보가」를 배웠다. 남도문화제 전국판소리명창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1996년 3월 29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11호 판소리[흥보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강광례가 보유하였던 「흥보가」는 동편제(東便制) 박초월(朴初月)[1917~1983] 바디인데, 송흥록, 송광록(宋光祿), 송우룡, 송만갑(宋萬甲)[1865~1939], 김정문(金正文)[1887~1935]으로 이어진 소리이다.

김명신은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출신이며, 광주의 오수암(吳壽巖)[1908~1945]에게 단가와 「흥보가」 일부를 배웠다. 이후 정광수에게 「수궁가」 일부를 배우고, 김성수에게 「춘향가」, 임준옥에게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를 일부 배웠다. 이어 최난수에게 「수궁가」 한바탕과 「흥보가」를 배웠고, 40세 이후에 오정숙을 스승으로 모시고 판소리 다섯 바탕을 익혔다. 57세인 2002년 제3회 공주전국판소리명창명고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2005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흥보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김명신은 43세부터 정읍국악원 강사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써 정읍 지역 판소리 문화 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2023년 7월 26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제자로는 박상주, 정상희, 박현정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전북특별자치도는 판소리의 발상지이자 최고의 전승, 향유지로서 판소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의 판소리는 전주, 남원, 고창, 익산 그리고 정읍을 중심으로 하여 활발하게 전승되어 왔으며, 현재도 정읍사국악원 등을 중심으로 정읍의 판소리 문화를 다시 부흥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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