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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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광환 |
[정의]
정읍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동학농민군의 역사적 평가와 의의.
[개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전라도 고부군은 현재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 속하여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본고장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계획서인 사발통문이 작성되었던 곳이며,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집결한 말목장터와 최초의 전투지인 황토현이 있는 곳이다.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고부군수 조병갑이 백성들을 수탈한 역사의 현장인 고부관아가 있었으며 만석보가 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인 전봉준·김개남·손화중·최경선 등이 태어나거나 자란 곳이다. 1894년 이 땅에는 전봉준을 비롯하여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격동의 시대에 정읍에서 필연적인 만남을 통하여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내었다. 1894년 정읍 땅에서 동학농민군이 만들어 간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찾아 떠나 보자.
[동학농민혁명의 배경]
19세기 순조·헌종·철종 3대 60여 년간에 걸쳐 나이 어린 왕들이 즉위하자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로 이어지는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중앙 정치의 기강이 문란하여지고, 탐관오리의 득세로 사회는 동요되고 삼정의 문란이 초래되었다. 삼정이란 봉건적 수취 체제의 기본이 되는 전정[토지세], 군정[16~60세에 해당하는 성인 남자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내는 세금], 환곡[춘궁기 때 관곡을 빌려 주고 추수기 때 갚도록 한 제도]을 말하는데, 삼정이 지방관들의 농간으로 수탈의 수단으로 변하여 농촌 사회의 파탄을 가져왔다.
특히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청·일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인하여 조선에서의 주도권은 청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에서의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고자 경제적 침략에 주력하게 되었고, 값싼 생필품을 미끼로 한 일본의 쌀 수입이 늘어나게 되자 조선은 일본의 식량 공급지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국내 쌀값은 폭등하게 되어 조선 민중은 물가고와 식량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부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거두어 민중을 수탈하였으며, 관직을 직접 매매하는 매관매직도 여전히 성행하였다. 돈으로 벼슬을 산 관리들은 각종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민중을 수탈하는 방법도 다양하여졌다.
이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봉건 통치 계급의 횡포와 외세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한 민중의 저항 의식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와 같이 봉건 체제의 모순이 깊어 가는 가운데 농민 봉기가 발생하여 1892년경에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농민 항쟁의 조직과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동학이었다. 동학은 최제우가 1860년 서학[천주교]에 대립하여 창시한 민족종교로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을 내걸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갈파하였다. 당시 봉건 지배계급은 민중을 오로지 수탈의 대상으로만 보았으나, 동학은 평등사상을 제시하였다. 이는 봉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유교적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불온사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만, 민중의 계층적 요구를 반영한 이념이었기에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1864년 체포되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홀리는 망령된 설을 퍼뜨렸으며 평상시에 난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무리를 모았다’는 죄명으로 대구에서 처형되었다. 물론 동학은 일절 금지되어 탄압을 받았다. 이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동학의 교세가 더욱 확장되었고 동학의 합법성을 요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바로 교조 신원 운동이다. 이에 두 차례의 집회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궐기하여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그 뒤 동학농민군을 지도할 인물로 정읍의 전봉준이 등장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고부농민봉기]
고부 지역은 호남 제일의 쌀 생산지이자 농산물 집결지였으며, 서해안을 끼고 있어 해산물 또한 풍부하였다. 그런 만큼 여느 지역보다 탐관오리의 횡포와 일제의 경제적 침략이 극심한 곳이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를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아버지 조규순의 송덕비각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을 고부 농민들에게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기존의 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이 만석보를 축조하는 데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였으며, 가을에 수세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였다.
마침 1893년은 극심한 흉년이 들어 1893년 11월, 40여 명의 고부 농민들이 관아로 몰려가 만석보의 수세 감면을 진정하였으나 조병갑은 오히려 양민을 선동하는 난민이라 하여 그 가운데 대표자 몇 사람을 구금하였다. 이로 인하여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여지고 전봉준 등 20여 명은 송두호의 집[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대뫼마을]에 모여 고부군수 조병갑 외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전주성을 함락한 후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목표를 사발통문에 담아 거사 계획을 결의하였으나, 조병갑의 익산 발령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 후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부임하자, 1월 10일 새벽 배들평야 주변의 10여 마을의 농악대에 이끌려 농민들이 말목장터에 모였다. 농민들은 인근 대밭에서 죽창을 만들어 고부관아를 향하여 진격하여 점령하였으나, 이미 조병갑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분노한 동학농민군은 옥을 부수고 무고한 양민을 석방하였으며, 창고 문을 열어 강탈당하였던 곡식을 인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원한의 대상인 만석보를 허물고 말목장터에 진을 치는 한편 백산(白山)에 토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전봉준은 고부농민봉기를 이끌던 1894년 2월 20일경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함께 봉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즈음 새로 부임하여 온 군수 박원명이 적극적인 폐단의 시정을 약속하자 농민들은 자진 해산하였다. 한편, 안핵사 이용태는 봉기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하여 농민 봉기의 주모자를 색출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집을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전봉준은 불가피하게 전라도 무장(茂長)으로 달려가 손화중을 설득하여 무장 구수마을에서 집결한 후 약속된 장소인 고부 백산으로 진격하였다. 이때를 기하여 이미 기별을 받는 태인과 원평 등지에서도 동학농민군들이 백산으로 향하였다. 1894년 3월 26일, 고창·무장·흥덕·부안·정읍·태인·금구·김제 등지에서 모여든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은 백산에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동학농민군 지도부를 추대하고 군사 대오를 정비한 다음 거사의 대의를 선포하였다.
[최초의 전투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둔 동학농민군]
고부를 나선 동학농민군이 태인을 들이치고 부안동헌을 공격하는 등 주변 고을을 석권하고 있을 무렵, 전라감사 김문현은 감영군과 보부상패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고부로 출동시켰다. 1894년 4월 초, 전라감영군과 보부상군 2,300여 명은 고부군 백산을 향하여 진격하여 왔다. 동학농민군은 전라감영군과 보부상군을 황토현으로 유인하여, 1894년 4월 6일 밤부터 4월 7일 새벽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관군과 맞붙어서 큰 승리를 거둔 황토현 전투이다.
관군은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병사들이 전사하였다. 관군의 시체는 황토재 논바닥에 널려 있었는데, 관군의 규율이 형편없었음을 말하여 주듯 주머니에는 오는 길에 약탈한 물건들이 가득하였고, 전사자 중에는 남자로 변장한 여자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고 한다. 황토현 전투 승리로 사기충천한 동학농민군은 불과 한 달여 만에 전라도 일대를 휩쓸면서 각 고을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다.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을 양호초토사에 임명하고 군사 800명을 파견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전주성에 입성한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동학군은 장성 월평리의 황룡촌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경군은 대패하였고 동학농민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하였다.
한편 정부는 고부군수·전라감사·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의 시정을 약속하였다. 때마침 앞서 요청하였던 청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일본군도 조선에 병사를 출동시켜 마침내 조선은 청·일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민족적 위기를 접한 동학농민군은 1894년 5월 8일 정부가 요청한 휴전 제의에 각종 폐단을 시정하는 내용의 개혁안을 제시한 후 수락의 뜻을 밝혔다. 관군과 화약을 맺은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일대에 동학농민군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동학농민군이 주체가 되어 지방자치를 실시하였다.
전라도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 정치의 실현을 꾀하던 전봉준은 일병(日兵)이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대원군에게 섭정하게 하고, 청·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1894년 9월 중순 전라도 삼례에서 호남·호서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이끌고 다시 봉기하였다. 전봉준은 전주 삼례를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고 동학농민군을 인솔하여 논산에 집결한 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공주로 진격하였다.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을 공격하여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무기와 화력으로 인하여 우금치에서 대패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논산·금구·태인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연전연패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순창 피노리로 피신하여 재기를 꾀하던 중 체포되어 1895년 3월 30일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동학농민혁명은 1년여 동안에 걸쳐 수십만의 희생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났다.
[동학농민혁명의 의의]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농민봉기를 시발점으로 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민중의 자각에 의한 전국적 농민 항쟁으로서 근대사회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1차 농민 항쟁은 자유 민권을 위한 반봉건 항쟁이었으며, 2차 농민 항쟁은 일본 침략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민족자존의 반외세 항쟁이었다. 지배, 예속 관계에 기초한 봉건적 사회 경제체제를 무너뜨리고 평등, 자유, 자치의 원칙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경제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한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무능한 정부와 보수 양반 계층의 연합 세력, 그리고 정부가 끌어들인 외세에 의하여 실패로 끝났다. 비록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하였으나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안팎의 모순을 지양하고 스스로 발전의 길을 찾아가려는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3·1운동, 4·19혁명 등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