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020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성실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지역에서 발원한 강인 동진강 일대에서 삶을 영위하여 온 사람들.

[개설]

동진강(東津江)은 정읍에서 발원하는 유일한 강이다. 동진강은 정읍의 내장산, 입암산, 상두산과 김제의 모악산 등지에서 첫 물길을 내어 정읍, 김제, 부안의 호남 들녘을 적시고 서해로 유입된다. 수만 년 전부터 동진강 유역에서 인류가 삶을 영위하였고, 동진강은 마한과 백제의 등장 및 성장 배경이 되었으며, 한반도 도작 문화의 중심지이자 최대 곡창 지대인 호남평야를 살찌우고 일구어 냈다. 동진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정읍 시민들이 다양한 생업 활동을 이어 오며 살아왔다. 동진강은 전북특별자치도 남서부에 위치하며 전체 유역 면적은 1,856㎢에 달한다.

[동진강의 역사]

‘동진강(東津江)’의 이름은 부안군 ‘동진면’으로 흐르는 강이라는 데서 비롯되었으며 『고려사(高麗史)』에 ‘동진’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였다. 동진강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밖에 동진강의 발원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나 19세기에 제작된 『동여도(東輿圖)』에서 동진강에 대한 역사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시대 동진강은 전라도 4대 천(川) 중 한 곳으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동진강이 정읍 내장산에서 발원하여 정읍천으로 흘러 이평평야에 이르며 태인천은 상두산에서 발원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동진강의 발원지를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동진강은 본류인 태인천, 정읍천, 고부천, 원평천, 신평천 등의 하천을 비롯하여 모두 87개의 지류로 형성되어 있다. 수만 년전부터 인류가 삶의 터전으로 삼아 온 곳으로 마한과 백제의 성장 배경이 되기도 하였으며, 호남의 역사와 문화를 키워 왔다. 동진강 유역권에서 구석기 시대 유적이 확인되었고 다양한 종류의 석기 및 석기를 제작한 터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이 무렵부터 동진강을 터전으로 인류가 생활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동진강 유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과 유물은 특히 부안 계화도 부근에 집중 분포하고 있으며 조개무지 유적과 빗살무늬토기편이 발굴된 바 있다. 동진강 유역에서 최초로 정밀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정읍천 지류인 입암 접지리 유적이다. 고인돌떼 사이에서 토기편과 돌무지노지 등이 발견되어 동진강 일대 신석기인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청동기 시대 동진강 유역권의 생활상은 정읍 가정리 정호유구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하여 드러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송국리형 문화 유적이 동진강 일대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청동기인의 주거문화와 더불어 당시 죽음 의례와 묘제 문화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지표는 바로 고인돌이다. 동진강 유역권은 고인돌이 다수 발견된 고창과도 인접하여 있는데 정읍 지역에서 확인된 고인돌만 하더라도 2006년 『문화유적분포지도』 기준 45개소 177기이다. 전북 지역에서는 두 번째로 많은 분포이다. 마한 정치체가 등장한 이후 동진강 일대에는 크고 작은 마을이 등장하였다. 정읍천 유역인 입암면 신면 마을, 정읍 신정동 유적, 정읍 오정 유적, 정읍 수성동 용흥리 유적, 정읍 북면 이문 유적 등에서 주거지가 발굴되었고 이 시기 동진강 유역권의 마한 유적지를 통하여 마한인들의 문화상과 백제로 이행하여 가는 변화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백제가 성장함에 따라 농경 기반 및 교통의 요지였던 동진강 유역은 더욱 주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백제 멸망 이후에도 부흥 세력의 배후 지역이 되어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2013년 발간된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정읍 고부 지역과 정읍천을 사이에 둔 북면의 이문마을에서 후백제와 관련된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원삼국 시대 주거지를 비롯하여 고려 시대 건물지와 조선 시대 무덤 등이 조사되어 해당 시기 동진강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동진강 유역은 조선 시대 중요 역사 유적지도 다수 품고 있는데, 『조선왕조실록』 이안처 내장산, 정읍 무성서원과 태산 선비문화 관련 유적, 정읍 김명관 고택 등이 있다. 동진강의 발원지인 내장산 까치봉 근처에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왕조실록』을 수호한 용굴암과 은적암 그리고 비래암이 있다. 이 중 용굴암만 오늘날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었다. 용굴암은 현재에도 철제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어서 당시로서도 피신처의 적격지로 간주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북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인 정읍 무성서원동진강의 지류인 칠보천 유역의 칠보면 무성리시산리 일원에 있다. 조선 초부터 400여 년을 이어 온고현 향약과 『조선왕조실록』을 수호한 안의손홍록을 모신 남천사 등의 선비문화 유적지도 자리하고 있다. 한편 동진강 지류인 도원천 가에 있는 산외면 오공리 소재 정읍 김명관 고택은 1784년 건립된 국가민속유산이다. 마당의 크기와 위치, 대문에서 안채에 이르는 동선의 관계가 뛰어나다는 정평이 나 있고 동진강 유역의 조선 시대 양반가 모습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양반가의 위엄이 느껴지기보다는 검소하고 나눔의 미덕이 엿보이며 이를 통하여 당시 생활양식을 짐작할 수 있다.

1925년 동진수리조합을 설치하고 동진강 유역 종합 개발을 시작하였으며 동진강을 안고 있는 정읍의 곡창 지대는 대지주의 토지 집중이 일어나게 되었다. 수많은 일제 수탈의 증거 가운데서도 오늘날 정읍의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문화유적으로 신태인읍 화호리에 진출한 일본인 지주 구마모토 리헤이의 대규모 농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교류 중심지로서의 동진강 유역]

동진강은 대부분의 유역이 평지이며 하구 쪽으로 넓은 간석지가 분포되어 있어 바닷물의 영향을 받는 하천 구간이 넓은 편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이 자연 하천을 따라 배가 다녔다. 동진강 일대는 수로와 육로 모두 편리한 교통을 제공하였기에 물자와 사람이 모여 큰 고을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동진강 유역에는 여러 나루터가 분포되어 있었는데, 이 나루터들을 통하여 여러 물자와 사람들이 오가는 교통의 요지가 되기도 하였다.

원천나루터는 조선 시대 고부의 영원역[현재 영원면 운학리 태동마을]에서 김제의 내재역[현재의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까지를 잇던 역로에서 동진강을 건널 목적으로 만들었으며,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신태인읍 화호리를 연결하였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신태인에 화호진(禾湖津)이 있었으나 현재는 화호진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백산 지역은 백제부흥운동 당시 최후 저항지로 알려진 백강 전투가 치러진 곳으로 추정되며 마한 시대 이후 물류 집산지로서 주요 유통의 장이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한편 동진나루터는 『동여도』『대동여지도』에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재의 동진대교 근방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진나루터는 조선 시대 주요 교통의 요지였으며, 동진강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서울이나 전주에 갈 때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동진나루터에서는 떼배나 나룻배로 강을 건넜으며 나룻배에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농산물과 가축 등 여러 물자도 함께 이동하였다.

[동진강 일대 정읍 농어민의 삶]

넓은 평야와 태인천을 끼고 있는 만석보 일대는 물자가 풍부한 고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은 태인천과 정읍천 합류 지점에 보를 쌓으면서 농민을 강제 동원하였고 거목을 마구잡이로 벌목하였다. 이를 계기로 1894년 농민이 봉기하여 만석보를 부수었고 해당 사건은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한편 호남평야는 동진강을 끼고 형성된 곡창 지대로서 일제 강점기 쌀 수탈의 대상이 된 통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25년 동진수리조합이 설립되어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에 의한 농업 개발 사업을 추진하게 되면서 한국 최초로 유역 변경 사업으로 인한 운암댐 축조와 인공 수로가 건설되었다. 동진수리조합은 섬진강 본류와 지류가 만나는 지점을 지나 하류인 임실 옥정리에 저수지를 건설하면서 그 물을 동진강 유역으로 끌어들이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정부 보조금은 불과 18%였고 나머지 공사 비용을 조합원이 부담하게끔 하였다. 일본인 지주들은 수리조합비를 소작료에 포함시켜서 걷기 시작하였고 소작인들은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1934년과 1935년 신태인읍 화호농장의 400여 명 소작인들은 정부와 농장주에게 소작료 인하를 거듭 요구하였으나 해결되지 않았고 소작쟁의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동진강 일대에는 농사를 짓던 농민들 외에 동진강에서 어업 활동으로 생업을 이어 오고 있는 어민의 삶도 존재한다. 수원지에서 정읍, 김제를 지나 죽산에 이른 동진강에는 붕어, 메기, 잉어, 참게, 장어, 숭어 등 민물고기가 풍부하였다고 하나 새만금 간척 사업이 시작된 이후 동진강물이 민물화되면서 어류의 다양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나마 잡히던 민물고기마저도 현재는 많은 종이 자취를 감추어 반농반어의 삶을 이어오던 주민들의 생활은 크게 변화하였다. 현재 동진강에서 어업 활동을 하는 이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한편 정읍 시민들의 기억 속에는 정읍천과 태인천 합류 지점인 만석보 유적지 일대에서 어린 시절 풀게잡이를 하며 놀던 일이 남아 있다. 1970년대까지도 만석보 인근에는 바닷물이 들어왔고 썰물 때면 풀게와 숭어가 많이 잡혀 주민들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숭어잡이는 특별한 어업 기술이나 도구 없이도 잡는 것이 가능하여 마을 여성들이 주로 어획 활동을 하였다. 풀게는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던 것으로 ‘기름에 튀기면 풀냄새가 난다’ 하여 풀게로 불렸다고 한다.

[동진강과 풍류문화]

동진강 일대는 예부터 풍류문화가 발달하기도 하였는데 정읍은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리풍류, 구례풍류의 초석인 향제 줄풍류 발상지이기도 하다. 향제 줄풍류는 지방에서 전하여 오고 있는 현악 영산회상으로 풍류방에서 주로 연주하였기에 ‘풍류’라 하였고 현악기가 중심이 되어 ‘줄풍류’라 불렀다. 민속 예술에 대하여 언급할 때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정읍농악이다. 농악은 농촌 사회 공동체 문화 형성 및 세시풍속과 깊은 연관이 있는 종합 민속 예술이다. 정읍농악은 마을 공동체 단위로 전승되어 왔는데,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약간의 변화를 맞았다. 고부봉기 당시 주모자들이 배들평을 중심으로 여러 마을 풍물패를 동원하여 수천 명의 고부 농민을 말목장터로 모은 것이다. 동학농민군 훈련 시에는 사기 진작을 위하여 농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1910년대 정읍농악은 근대 연예 농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입암면 대흥리에서 일어난 신흥종교 보천교에서 종교 의례로서 농악을 채택하여, 농악 명인들이 정읍천 유역 입암면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동진강과 정읍의 생활, 민속문화]

정읍천 변은 동진강 수계에 속하는 동진강의 지류이다. 정읍천은 현재 시민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어 평상시에는 시민의 휴식처로 기능하고 있는데 매년 2월이 되면 정월대보름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정읍 시민 공동체가 함께하는 대규모 민속행사인 정월대보름 행사는 정읍시와 정읍우도농악회에서 주관하고 있으며 정읍의 화합과 안녕, 시의 발전을 기원한다. 정읍천변 외에도 정월대보름 행사는 정읍시 곳곳에서 열리는데, 덕천면 우덕리는 청년회에서 대보름 행사를 준비하기도 한다. 주민들은 1년 동안의 소원을 빌 달집을 만들고 쥐불놀이, 연날리기, 연등날리기, 나누어 먹을 음식 등을 준비한다.

산외면의 대보름행사는 ‘줄다리기 당산굿’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정량리 원정 당산제는 마을 주민이 총동원되어 정월대보름 행사를 마치 축제처럼 즐기고 있다. 줄다리기를 통하여 마을 전체의 화합을 보여 주고 있으며 당산제 이후에는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뒤풀이가 하루 종일 이어진다. 정읍 축현천 옆의 북면 원오류마을에서는 마을 번영과 무탈을 기원하는 마정리 원오류 단속곳춤 당산제가 열린다. 기념식, 풍물놀이, 단속곳춤, 당산제, 달집태우기, 무당굿 순서로 이어지는 대보름 행사는 다른 지역과 다르게 여성들 위주의 참여가 눈길을 끈다. 마을 여성들은 가랑이가 터진 단속곳을 뒤집어쓰고 춤을 추는데, 정형화된 춤사위 없이 양손을 자유롭게 흔들며 풍물패 장단에 맞춰 움직인다.

한편 동진강 일대에서는 주민들의 다양한 생활사적인 면도 살펴볼 수 있는데,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이 찾는 정읍천변 빨래터의 모습도 그중 하나이다. ‘빨래터’라는 단어는 21세기에 매우 낯설다. 특히 ‘도시’ 안의 빨래터는 더더욱 그렇다. 빨래터는 과거 농촌이든 도심이든 마을 어딘가에 흔하게 있던 장소였음에도 산업의 발달과 도시화 과정으로 인하여 점차 사라져 간 전통적인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간의 노동력은 각종 기계와 컴퓨터 기기들로 대체 가능하게 되었고 이 같은 과정에서 빨래터 역시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농촌 지역에서조차도 거의 사라져 버린 공동 빨래터가 도심 한복판에 존재한다는 일은 오늘날까지도 이 장소를 기반으로 마을 주민들의 주체성과 연대성 강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읍시 정동교에서 연지교까지 시내를 흐르는 정읍천은 천변에서 산책을 즐기는 시민이 자주 찾는 곳이며, 강피천(江皮川)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천변에는 옛날부터 빨래터가 있었다고 하나 정확한 생성 시기는 알 수가없다. 이 빨래터들은 정읍천 변에서 솟아나는 지하수로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우물가 빨래터처럼 인위적으로 생성된 곳과 달리 자연발생적 특징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빨래터가 특별한 장소처럼 보이지만 과거, 특히 하천이 정비되기 이전에는 물이 흐르는 곳이면 아무 데나 빨래터가 되었다. 정읍천변 빨래터는 2005년 정읍시의 노력으로 보기 좋게, 사용하기 편하게 재정비되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1990년대 도로망 확충으로 인하여 이 빨래터들은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복개되기도 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정읍시청에 찾아가 항의하였다. 정읍시는 2001년 빨래터를 복원하였으나 2010년 환경 단체가 수질 오염의 문제를 들고 나오자 다시 빨래터는 철거될 위기에 처하였다. 하지만 이후 빨래터는 다시 복원되어 2023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성 주민들은 정읍천이 오염되지 않게 하려고 빨래 시에는 반드시 폐식용유로 만든 비누만 사용하고자 암묵적 규칙을 만들었다. 최대한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 오래도록 이어져 온 그들만의 공동체 문화를 살리고자 애쓰고 있다. 천변빨래터를 이용하는 이들은 남녀노소 다양하나, 주로 주부들이 많이 찾는다. 30~40대 주부들부터 70~8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이용하며, 간혹 아이들이 엄마를 따라와 함께 빨래를 돕기도 한다.

[동진강과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날의 정읍 시민]

지난 2015년 정읍시립박물관동진강의 역사와 문화, 생태 등을 아우르는 총체적 이야기를 주제로 특별 전시회 ‘동진강, 천년의 물길에 깃든 삶과 이야기’를 선보인 바 있다. 동진강 유역의 자연과 사람, 삶, 문화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차별화된 전시를 연출하여 동진강을 재조명하였다. 예비 전시회에서는 ‘동진강 흙 드로잉(drawing)하다’라는 주제로 동진강 스토리를 흙으로 빚어 만든 작품 25점이 기획전시실에서 전시되었다. 또한 두 번째 예비 전시인 ‘동진강에 깃든 동학농민혁명 이야기’는 동학농민혁명기념제가 진행되는 황토현 전적지 특설 부스에서 개최되었다. 본 전시에서는 태인천과 정읍천, 고부천, 원평천, 신평천 등 주요 강변에서 찾아낸 주민들의 삶과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유물 위주의 전시에서 탈피하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차별화된 전시를 개최하였다. 이처럼 정읍 시민에게 동진강은 중요한 젖줄이자 역사, 문화, 자연자원이고 지역 예술가에게는 중요한 예술의 원천인 셈이다. 정읍천은 정읍 시가지 한가운데를 흐르는 도시형 하천으로서 체육공원, 물놀이장, 자전거도로, 빨래터 등이 조성되어 있어 정읍 시민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정읍천 변에서는 정읍시가 주최하는 각종 문화 행사가 개최되고 있어 오늘날에도 문화예술을 꽃피우고 전승하는 중요한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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