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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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 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동희 |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의 역사.
[개설]
현재의 정읍은 조선 시대에 고부군, 태인현, 정읍현 등 3개의 독립된 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고부군은 종4품 군수가 임용되고, 태인현과 정읍현은 종6품의 현감이 임용되는 읍이었다. 군사적으로는 3개현 모두 전주진관(全州鎭官)에 편제되었다. 1895년 8도제가 혁파되고 23부제로 개편되면서 부·목·군·현이 군으로 통일되어 고부군·태인군·정읍군이 되었으며 전주부에 속하였다. 1896년 23부제가 혁파되고 다시 13도제로 개편되어 전라북도에 편제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태인군은 정읍군에 병합되고, 고부군은 거마면·덕림면·백산면이 백산면으로 통합되어 부안군(扶安郡)에 편제되고 나머지 면은 고부면, 소성면, 영원면, 이평면, 덕천면, 우순면, 정토면 등 7개 면으로 통합되어 정읍군에 통합되었다. 고부군 부안면(富安面)은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흥덕군으로 편입되었다.
[호구·토지·교통]
1789년(정조 13)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수록된 호구수는 고부군 6,522호에 2만 8631명[남자 1만 1758명, 여자 1만 6873명], 태인현 7,849호에 3만 1205명[남자 1만 4020명, 여자 1만 7185명], 정읍현 2,466호에 9,674명[남자 4,669명, 여자 5,005명]이다. 1790년대 『호남읍지』에 등재된 전답은 고부군 8,819결 86부[논 5,709결 7부 8속, 밭 3,110결 78부 2속], 태인현 8,853결 69부 6속[논 4,684결 88부 7속, 밭 4,168결 80부 9속]에 화전(火田)이 2결 7부 5속, 정읍현 2,791결 8부[논 1,517결 4부 1속, 밭 1,274결 3부 9속]에 화전 2결 82부 5속이다.
고부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596리[약 234㎞]로 걸어서 6일 거리이며, 전라감영은 동쪽으로 110리[약 43㎞]로 하루 거리이다. 역원은 고부군에 영원역(瀛原驛)[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영원면 역촌, 운학리], 태인현에 거산역(居山驛)[현 정읍시 태인면 거산리], 정읍현에 천원역(川原驛)[현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 등 3개 역에 11개 원(院)이 있었다.
[태인 고현동 향약과 유교 문화]
불우헌 정극인은 처향인 태인으로 낙향하여 1475년 『고현동 향약(古縣洞鄕約)』을 시행하였다. 향약은 자치 규약으로 『고현동 향약』은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 동안 이어졌다. 태인 고현동 향약 29책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태인을 중심으로 유교 문화가 발전하여 국가에서 공인한 사액 서원이 정읍 무성서원(武城書院), 남고서원(南皐書院), 고암서원(考巖書院), 정충사(旌忠祠) 등 4곳이었다. 정읍 무성서원은 통일 신라 때 태산군수 최치원을 주벽으로 신잠, 정극인을 비롯하여 모두 7현을 모셨다. 2019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남고서원은 16세기 호남 사림의 한 학맥을 형성한 일재 이항과 제자 의병장 김천일을 향사하였으며, 고암서원은 정읍에서 사사(賜死)된 우암 송시열과 수제자 권상하를 배향하였다. 정충사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고부 출신 동래부사 송상현을 모셨다. 태인에서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판매용 책인 방각본(坊刻本)이 출간되었다. 방각본은 서울, 전주, 나주, 태인, 달성, 안성 등 소수의 한정된 지역에서 출간된 책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 수호]
1592년 임진왜란 때 경기전참봉 오희길(吳希吉), 태인의 선비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은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과 경기전의 태조어진(太祖御眞)을 정읍 내장산으로 이안하여 용굴암, 은적암, 비래암을 옮겨 가며 1년여 동안 수호하였다. 내장사 승려 희묵(希黙) 등 4~5인, 인근 읍의 산척(山尺) 100여 명이 함께하였다. 그 결과 조선 전기 4대 사고 중에서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었다. 문화재청에서 제정한 ‘문화재지킴이날’ 6월 22일은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긴 날이다.
[영조 대 태인현감 박필현의 반란]
1728년(영조 4) 소론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의 반란에 태인 지역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은 왕을 호위하러 간다는 구실을 내세워 군사를 이끌고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들어갔다. 그러나 협조하기로 하였던 전라감사 정사효(鄭思孝)가 변심하여 전주성문을 열어 주지 않자 군사는 흩어지고 박필현은 도주하여 상주에 숨어 있다가 잡혀 참수되었다.
[동학농민혁명, 고부농민봉기와 황토현전투]
1894년 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 지역 농민군들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여 고부관아를 장악하였다. 고부봉기는 지역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 항쟁으로 확대되었다. 무장에서 기포하고, 백산에 각지의 농민군들이 집결하여 정읍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제정된 5월 11일은 황토현 전승일이다.
[조선 후기 태인 의병]
1906년 면암 최익현을 추대하여 임병찬을 비롯한 전북의 유림들이 태인의 정읍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태인의병은 순창객사 지휘소에서 해산하였으며, 최익현과 임병찬을 비롯하여 고석진·최제학·김기술 등 전북의 유림 12인은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 태인의병[병오창의]은 큰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으나 전북특별자치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항일 의병으로 호남 지역에 의병 항쟁을 확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