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1327
한자 內藏山 素材 文學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명표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 있는 내장산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

[개설]

내장산(內藏山)은 국내에서 단풍의 명승지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내장산은 조선 8경 중 하나였으며,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불렸다. 지금도 가을철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내장산의 단풍을 구경하러 찾아온다. 일제 강점기에는 궁핍한 현실 속에서도 각 신문마다 내장산 탐승객들을 모집하였다. 1939년 일본 오사카에서는 내장사(內藏寺) 사진이 들어간 탁상 일기를 팔고자 『조선일보』에 광고할 정도였다.

하지만 내장산은 사계절 볼거리가 풍부한 절경이다. 골짜기마다 신록이 우거지는 여름의 내장산과 봉우리마다 백설로 뒤덮인 겨울의 내장산도 가을 단풍 못지않다. 다만 1년 중에서 가을의 단풍이 가장 유명하므로, 조선조부터 내려오는 정읍시사는 1936년 11월 ‘내장승경(內藏勝景)’이라는 제하로 한시를 현상 모집하였다. 오래전부터 시인 묵객들이 내장산을 찾아와서 사철마다 바뀌는 풍광을 노래한 작품은 무수한데, 그중에서 근대 이후의 작품을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본다.

[한시]

내장산의 풍경을 읊은 문학 작품 중에서 한시는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한다. 1924년 9월 4일 정인보(鄭寅普)[1893~1950]는 『동아일보』에 「내장산 벽련암(內藏山 碧蓮庵)」이라는 제목의 오언율시를 기고하였고, 홍명희(洪命憙)[1888~1968]도 「내장산 벽련암」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내장산의 풍경을 노래하였다.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문필가에 의하여 동일 제목으로 노래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최고의 선지식(善知識)으로 추앙받는 박한영(朴漢永)[1870~1948]은 「내장산곡구(內藏山谷口)」, 「속화내장운(屬和內藏韻)」, 「방이난곡초당람벽초위당남유시초속화내장사운(訪李蘭谷草堂覽碧初爲堂南遊詩草屬和內藏寺韻)[이난곡 초당을 방문하기 위하여 벽초 위당과 함께 남쪽을 순회하던 시초를 내장사 가락에 부쳐 읊은 것]」, 「내장산사승(內藏山四勝)」, 「벽련만풍(碧蓮晩楓)」, 「추령현경(秋嶺懸徑)」 등을 남겼다. 이 중에서 「내장산골짜기」를 소개한다.

협구춘심시내장(峽口春深是內藏)[골짜기 입구는 봄이 깊어 이곳이 내장이로구나]

도화천수암사양(桃花千樹暗斜陽)[수많은 복사꽃에 저녁놀이 듣는구나]

선원불촉휴요설(仙源佛躅休饒舌)[신선의 연원이요 부처님의 발자취를 어이 말할 수 있으랴]

일로홍하불기장(一路紅霞不記長)[한 길 붉은 안개를 길게 나타낼 수 없구나]

박한영은 굽이굽이 골짜기마다 보물을 간직하고 있어서 ‘내장산’이라고 명명된 내장산의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내장산이 ‘신선의 연원이요 부처님의 발자취’인 줄 알아보았다고 한다. 박한영이 만년에 내장산에 귀의하여 1948년 복사꽃이 피던 4월에 입적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행문]

기행문 중에는 1925년 박한영과 내장산을 방문하고 나서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1926년 펴낸 『심춘순례(尋春巡禮)』가 유명하다. 일행은 내장산록의 구암사(龜巖寺)를 거쳐 내장사 주지 백학명(白鶴鳴)[1867~1929]을 만나서 불출암(佛出庵)에 올랐다. 불출암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임시 보관하였던 곳이다.

다른 기행문은 1925년 7월 30일부터 1925년 8월 2일까지 『조선일보』에 기고된 「여름의 내장산」이다. 필자는 가을의 내장산 단풍을 구경한 적은 있으나 여름의 내장산은 처음 본 승려로 추정된다. 내장산의 색상을 단풍과 녹음으로 계절을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아래와 같은 절창으로 여름과 가을의 내장산을 비교하고 있다.

“붉고 누른 빛으로 연하고 선명하게 살풋 단장하여 놓은 것이 가을의 내장임에 반하여 순전한 녹색으로 위의 있게 씩씩하게 물들여 노흔 것이 여름의 내장이다. 가을의 내장은 구슬픈 물소리를 들으며 서리에 붉은 단풍을 꺾어 들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옛날의 회포를 가만히 노래하며 가슴에 넘치는 눈물을 흘리고 인생의 하잘것없는 무상을 저주하는 늙은 미인이 볼 것이오, 여름의 내장은 웃어진 덤불을 헤치고 그윽한 골짝을 더듬으며 구름을 밟고 안개 속을 헤매며 무서운 공포를 감(感)하면서도 오뇌와 번뇌 속에서 분투하면서 무엇을 찾는 열정적 젊은 철학자가 볼 것이다. 따라서 가을의 내장은 정적(靜的)이요 애적(哀的)임에 반하여 여름의 내장은 생적(生的)이요 고적(苦的) 열적(熱的)임이 사실이다.”

또 다른 기행문은 1922년 11월 23일부터 27일까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신각희의 「남유관풍기」이다. 일제가 고찰을 유린한 장면을 고발하고 있다. 일제는 내장사 경내에 요리집을 설치하고, ‘상비품’으로 창기까지 배치하였다. 내장사의 승려들은 일본인과 친일 인사들의 환락을 위하여 장작을 패고 불을 때느라고 허리가 굽어질 지경이었다.

“사내에는 요리점이 2개소나 잇고 또 일선(日鮮) 각 1인의 창기까지 상비품으로 있었음에 차(此)는 사(寺)의 경영인가 문(問)하였더니 차는 사의 경영이 아니라 상로(商路)에 신속하고도 영리한 일본인은 차사(此寺)에 자동차 통행이 시(始)하야 내객의 왕래가 빈번케 되던 거금 4년 전부터 본군 당국자와 교섭을 하고 지방 발전과 내객의 편의를 도(圖)한다는 미명하에 매년 추기에 40~50일간씩 차처(此處)에 내(來)하야 개점한다 한다. 최초에는 1개소이더니 작년부터 우(又) 내지인이 1인이 내하야 금(今)에는 2개소라 한다.”

천년 고찰 내장사를 주지육림(酒池肉林)의 환락장으로 타락시킨 모습이다. 신각희는 “탈속수도하는 사찰인지 근세 불량 남녀의 가위 오락장인 요리점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내장사의 실상을 곧이곧대로 전하고 있다. 인용문을 통하여서 내장사에 비구니들이 수행하던 월조암(月照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

내장산을 노래한 시인들은 무수히 많다. 최남선은 「조선유람가(朝鮮遊覽歌)」에서 “서리때 내장산은 비단이 곱다”라고 노래하면서 늦가을의 단풍을 노래하였다. 이은상(李殷相)[1903~1982]은 「호남풍토가(湖南(風土歌)」에서 “백제의 남은 곡조/ 어떠하온지/ 정읍촌 시악시께/ 물어볼꺼나/ 내장산 가는 길이/ 얘서 얼만지/ 갈마기 나는 곳을/ 바라보노라”라고 읊은 것도 모자랐던지, 「내장산」에서는 내장산 비자나무 숲을 보고 느낀 감흥을 “내장산 골짜구니 돌벼래 위에/ 불타는 가을 단풍 자랑 말아라/ 신선봉 등 너머로 눈 퍼붓는 날/ 비자림 푸른 숲이 더 좋더구나”라고 노래하였다. 이은상의 시비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 군락에 있다.

정읍 태생의 박찬(朴燦)[1948~2007]은 내장산을 우러르는 시편을 여럿 발표하였다. 박찬은 데뷔작 「상리 마을에 내리는 눈」에서 자신이 태어난 장명리와 내장산의 중간에 있는 상리에 내리는 안개를 통하여서 내장산의 비극사를 우화한 바 있다. 「서래봉 가는 길 1」에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원시적 욕망을 노래하였다.

“젊어 한때 나의 슬픔은 ‘인생은 그렇고 그럴 것’이라는 생각 때문. 그러나 그 생각 얼마나 시건방진 것이었나 생각 들기 시작했을 때 나의 부끄러움은 하늘에 닿았다. 지나온 삶이나 남은 삶(이젠 지난 삶이 남은 삶보다 길다) 모두가 젊은 시절의 치기에 다름 아님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문득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듯 막막함에 빠지고 말았다.// 한여름밤 모깃불 연기 피어오르는 고향집 마당 맷방석 위, 무르팍 베고 누우면 탁 탁 모기를 날려주시는 할머니 부챗살 소리에 맞춰 별 하나 나 하나…… 한량없는 별을 헤아리다 잠들던 시절로 문득 돌아가 있음이여. 할머니 눈 안에 비치던 그윽한 달빛!”

어렵지 않게 읽히는 시이다. 박찬은 어느덧 ‘지난 삶이 남은 삶보다 길다’는 사실 앞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잠들던 여름밤의 풍경을 회상한다. 그리하여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듯 막막함’에 빠질 때마다 외려 ‘한량없는 별을 헤아리다 잠들던 시절로 문득 돌아가 있음’을 깨닫고 평안하여진다. 시인이 아늑해질 수 있었던 것은 서래봉에 뜬 달에서 ‘할머니 눈 안에 비치던 그윽한 달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박찬은 이외에도 「사름에 묻는다-서래봉」, 「서래봉, 또 서래봉」, 「미르의 세상-서래봉 가는 길 2」, 「눈물-서래봉 가는 길 3」처럼 내장산 서래봉을 소재로 활용한 시편을 다수 남겼다. 심지어 박찬의 유고 시집 『외로운 식량』의 끄트머리에 놓인 시가 「소리를 찾아서-서래봉 가는 길」이다. 박찬의 ‘서래봉 가는 길’은 “지루하고 막막한 날이 끝나간다”는 운명의 찰나에서 원시적 질서가 온존하던 정읍에서 들었던 ‘할머니 부챗살 소리’를 들으러 가는 길이었다.

[소설]

소설 작품으로는 정읍 출신 작가 윤흥길(尹興吉)[1942~ ]의 『황혼의 집』이 대표작이다. 평소 고향 사랑이 대단한 윤흥길은 고향을 ‘비상금’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비상금처럼 고향은 자신이 필요할 때마다 긴히 쓸 수 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글쓰기를 지켜 줄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뜻이다. 윤흥길은 『황혼의 집』의 첫머리에서 내장산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마악 길을 건너려는 순간에 모퉁이 저쪽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적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으므로 나는 얼른 계집의 손을 놓아 버렸다. 볏단을 잔뜩 싣고 느릿느릿 구르던 달구지 한 대가 길옆에 가까스로 비켜 설 만큼의 여유를 두고 노랗게 쌍불을 켠 트럭의 행렬이 질주해 왔다. 달구지를 뒤따르며 길바닥에 흘린 나락을 쪼아먹고 있던 한 떼의 병아리가 날개를 파드락거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내장산 일대의 공비들과 전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의 토벌대였다.”

『황혼의 집』이 문제적인 이유는 위에 나와 있다. 사람들에게 단풍의 명소로 불리는 내장산에 동족상잔의 비극사를 간직한 생채기가 있다는 사실을 윤흥길은 되뇌이고 있다. 사실 내장산이 산봉우리들로 이웃한 순창의 회문산(回文山), 담양의 추월산(秋月山) 등을 한데 호출하면, 더 이상 단풍의 명산 내장산이 아니다. 내장산은 멀리 임진왜란희묵대사(希默大師)가 승병을 이끌고 가람을 지켰던 곳이고, 가까이는 동학 농민군들이 짚신을 갈아 신던 곳이며, 산사람들이 보급 투쟁을 벌이고 숨어들던 곳이자, 군경 토벌대들이 서래봉을 오르내리며 잔비를 소탕하던 역사적 장면들이 구비마다 묻혀 있는 상흔의 공간으로 자리를 바꾸게 된다.

이와 같이 내장산을 소재화한 작품은 다양한 결을 보여 준다. 그중에는 내장산의 단풍을 노래한 작품이 상당량을 차지한다. 하지만 내장산의 여름과 겨울을 노래한 작품도 적지 않다. 또한 내장산도 여느 산처럼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또 정읍에서 태어난 작가들에게는 돌아가 의지할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장소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