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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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開南 |
영어공식명칭 | Gim Gaenam |
이칭/별칭 | 기선(箕先),김기범(金箕範),김영주(金永疇)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광환 |
출생 시기/일시 | 1853년 9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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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4년 3월 26일 - 김개남 백산에서 동학농민군 총관령 추대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6월 25일 - 김개남 순천에 영호도회소 설치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10월 14일 - 김개남 남원에서 2차 봉기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12월 1일 - 김개남 관군에 체포 |
몰년 시기/일시 | 1894년 12월 3일![]() |
출생지 | 정량리 원정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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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이주지 | 동곡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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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 |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활동지 | 남원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
묘소 | 김개남 묘소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6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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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
성별 | 남성 |
본관 | 도강 |
대표 경력 | 동학농민군 총관령 |
[정의]
개항기 정읍 출신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가계]
김개남(金開南)[1853~1894]의 본관은 도강(道康)이며, 자는 기선(箕先)이다. 본명은 김기범(金箕範)이고, 도강 김씨 족보에는 김영주(金永疇)로 등재되어 있다. 아버지는 김대흠(金大欽)이고, 어머니는 익산 이씨(益山 李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 李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다. 형은 김영백(金永百)·김영수(金永秀)이고, 아들은 김백술(金伯述)이다.
[활동 사항]
김개남은 1853년(철종 4) 9월 15일 전라도 태인현 산외면 정량리 원정[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에서 태어나 동곡리 지금실[현 산외면 동곡리]로 이주하였다. 아버지 김대흠이 일찍 사망하여 큰형 김영백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김개남은 1890년 무렵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태인 접주로 활동하였다. 1892년 10월 1일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내걸고 열린 삼례집회 해산 후 김개남은 전봉준(全琫準)·손화중(孫華仲)·김덕명(金德明) 등과 함께 동학교도 수백 명을 이끌고 무장(茂長)으로 향하여 무장군수로부터 빼앗긴 돈 1,000냥을 받아 내기도 하였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 등의 주도로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나 학정을 일삼던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냈지만, 새로 부임한 고부군수 박원명의 설득에 하나 둘 대열을 이탈하여 봉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이용태가 역졸을 거느리고 고부로 내려와 동학교도들의 집을 방화하면서 체포와 살육을 일삼았다. 이때 전봉준은 각 지역에 봉기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무장현에서 손화중을 설득하여 봉기를 선언하고 부안의 백산(白山)으로 향하였다. 김개남은 이에 호응하여 태인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백산으로 향하였다. 서장옥(徐璋玉)과 김덕명(金德明)도 금산과 금구에서 각각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1894년 3월 26일 전라도 각지에서 백산으로 모여든 수천 명에 달하는 동학농민군의 추대로 전봉준이 대장이 되었고, 김개남은 손화중과 함께 총관령이 되었다. 이후 김개남은 황토현 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 전주성 점령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전주화약 이후 태인에 돌아와 있던 김개남은 5월 23일경 태인을 출발하여 5월 28일 장성 백양사에 머무르며 군량미를 확보한 후 약 1개월 동안 순창·옥과·담양·창평·동복·무안·순천·보성·곡성 등 전라도 일대를 순행하고 6월 25일 남원으로 들어왔다. 남원에서 금산·무주·진안·용담·장수를 관리하고 순천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여 영남 서남부 일대까지 세력을 떨쳤다.
1894년 9월 일제의 침탈에 맞서 재봉기할 때 김개남은 공주로 진격하는 전봉준과 합류하지 않고 남원에 머물렀다. 이후 10월 14일 저녁 8,000여 명을 이끌고 남원에서 재봉기하여 임실을 점령하였고, 10월 15일 임실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10월 17일에는 남원부사로 임명되어 내려오던 이용헌(李龍憲)을 전주에서 체포하여 처단하기도 하였다. 김개남 부대는 10월 22일 금산을 점령하였고, 11월 13일 2만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청주(淸州)를 공격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퇴각하였다.
김개남 부대는 청주 전투 후 진잠을 거쳐 11월 14일 연산에서 다시 집결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여 노성과 논산 쪽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김개남은 태인현 장금리 너듸마을[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은신하던 중 임병찬(林炳瓚)의 밀고로 12월 1일 체포되어 전주감영에 이송되었고, 12월 3일 전주에서 처형되었다.
[묘소]
1995년 4월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669-1에 후손들이 가묘를 만들고 묘역을 조성하였다. 가묘 앞 비문은 이이화가 쓰고, 전면은 강희남 목사의 글씨로, 뒷면은 여태명의 글씨로 새겼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