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657
한자 孫華仲
영어공식명칭 Son Hwajung
이칭/별칭 화중(化中),초산(楚山),손정식(孫正植)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상교동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조광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1년 6월 22일연표보기 - 손화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3년 3월 - 손화중 금구집회 주도
활동 시기/일시 1894년 3월 26일 - 손화중 동학농민군 총관령으로 추대
활동 시기/일시 1894년 12월 11일 - 손화중 관군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895년 2월 29일 - 손화중 사형 선고
몰년 시기/일시 1895년 3월 30일연표보기 - 손화중 사망
출생지 과교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과교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음성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상평동 음성마을지도보기
활동지 양실마을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묘소 손화중 묘소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상평동 산134 지도보기
성격 동학농민군 지도자
성별 남성
본관 밀양
대표 경력 동학농민군 총관령

[정의]

개항기 정읍 출신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가계]

손화중(孫華仲)[1861~1895]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화중(化中) 또는 화중(華仲), 호는 초산(楚山)이다. 본명은 손정식(孫正植)이다. 아버지는 손호열(孫浩烈)이고, 어머니는 평강 채씨(平康 蔡氏)이다. 부인은 고흥 유씨(高興 柳氏)이다.

[활동 사항]

손화중은 1861년(철종 12) 6월 22일 전라도 정읍현 남일면 과교리[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과교동]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음성리[현 정읍시 상평동 음성마을]로 이주하였다. 1880년 무렵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처남 유용수와 함께 승지(勝地)를 찾아 지리산 청학동으로 갔다가 때마침 경상도 일대에서 널리 퍼져 나가고 있던 동학(東學)에 매료되어 입교하였다. 손화중은 동학 입교 2년 뒤 고향으로 돌아와 부안·정읍·고창 지역을 넘나들며 포교 활동을 하였다. 이후 무장군 덕림리 양실마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을 근거지로 삼은 뒤 무장·부안·정읍·고창은 물론이고 광주·나주·담양·장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대상으로 포교하며 대접주가 되었다.

1892년 10월 1일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내걸고 열린 삼례집회 해산 후 손화중전봉준(全琫準)·김개남(金開南)·김덕명(金德明) 등과 함께 동학교도 수백 명을 이끌고 무장(茂長)으로 향하여 무장군수로부터 빼앗긴 1,000냥을 받아 내기도 하였다. 삼례집회 이후 점점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금구, 경상도 밀양에서 이른바 삼남집회가 개최되었는데, 손화중전봉준·황하일(黃河一) 등과 함께 금구집회를 주도하였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 등의 주도로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나 학정을 일삼던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냈고, 새로 부임한 고부군수 박원명의 설득에 하나 둘 대열을 이탈하여 봉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이용태가 역졸을 거느리고 고부로 내려와 동학교도들의 집을 방화하면서 체포와 살육을 일삼았다. 이때 전봉준은 각 지역에 봉기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고 전라도 무장현으로 내려와 손화중을 설득하였고, 손화중전봉준과 함께 무장에서 봉기를 선언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서장옥(徐璋玉)은 금산 일대에서, 김개남은 태인에서, 김덕명(金德明)은 금구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부안 백산(白山)으로 모여들었다.

1894년 3월 26일 전라도 각지에서 백산으로 모여든 수천 명에 달하는 동학농민군의 추대로 전봉준이 대장이 되었고, 손화중은 총관령이 되었다. 이후 손화중황토현 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 전주성 점령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손화중은 1894년 7월 최경선(崔景善)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과 함께 나주성을 공격하였지만 점령하지 못하였고, 정부와 전주화약이 체결되어 전주성에서 철수한 후에는 무장군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8월까지 장성·광주·나주 등 주변 지역을 담당하였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삼례에서 다시 봉기하였지만 손화중은 삼례에 합류하지 않고 전라도 광주에서 통문을 돌려 인근 동학농민군을 광주로 집결시켰다. 이때는 동학농민군이 나주성 점령에 실패하였고 집강소도 설치되지 못한 상황이라 나주성의 관군과 민보군이 배후를 치고 올라올 우려가 있었으며, 특히 일본군이 남해안 쪽으로 상륙하여 올 것에 대비하여 북상하는 전봉준 부대에 합류하지 않고 최경선과 같이 전라도 나주와 광주 일대를 지켰다.

공주 우금치에서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후에도 손화중은 나주를 포위하고 수차례 점거를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1894년 11월 27일 광주로 이동하였다가 12월 1일 휘하의 동학농민군을 해산하고 피신하였다. 손화중은 12월 11일 부안에서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되어 전주감영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1895년 3월 29일 사형을 선고 받았고, 1895년 3월 30일 새벽에 전봉준·김덕명 등과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다.

[묘소]

1996년 후손들이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상평동 산134손화중의 가묘를 만들고 묘역을 조성하였다.

[상훈과 추모]

손화중은 2005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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