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05
한자 現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재영

[정의]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정읍 지역의 역사.

[위치와 면적]

정읍은 동쪽으로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과 완주군, 서쪽은 부안군과 고창군, 남쪽은 순창군과 전라남도 장성군, 북쪽은 김제시와 접하고 있다. 지도상으로는 위도 35°27′~35°45′, 경도 126°43′~127°07′에 자리하고 있다. 면적은 692.78㎢로 605㎢의 서울특별시보다 크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 통계에 따르면 인구는 2023년 9월 현재 10만 3984명이다. 행정 구역으로는 1개 읍, 14개 면, 27개 법정동[8개 행정동], 141개 법정리[555개 행정리]가 있다. 시청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수성동에 있다.

[행정 구역 개편]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각급 관청과 교회·주택 등이 잿더미로 변하였다. 1976년 4월 20일 정주읍에 동부·서부·남부 출장소를 설치하였으며, 1981년 7월 1일 정주읍이 정주시로 승격하여 정읍군과 별도의 행정 구역을 이루었다. 1983년 2월 15일 정읍군 내장면 일원과 소성면·덕천면·북면 일부가 정주시로 편입되었으며, 1987년 1월 1일 행정 구역 조정으로 인하여 소성면 만수리가 고부면으로, 이평면 도계리가 덕천면으로, 정우면 산북리신태인읍으로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 정읍군 입암면 신정리가 정주시에, 정우면 마정리가 북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정주시정읍군이 도농 통합 정책에 따라 합쳐져 전라북도 정읍시가 되었다. 정읍시 발족 당시 행정 구역은 1개 읍, 14개 면, 12개 행정동이었으나, 그 후 1996년 6월 1일, 1997년 2월 6일, 1997년 7월 10일, 1998년 8월 1일, 1998년 10월 31일의 행정동 조정을 거쳐 1개 읍, 14개 면, 8개 행정동이 되었다.

[해방 이후의 사건]

1. 해방 이후 이승만과 김구의 정읍 방문

1946년 6월 3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정읍동초등학교에서 있었다. 한편 시기를 특정할 수 없으나 백범 김구는 해방 후 태인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던 김부곤(金富坤)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내가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라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의 해석에 많은 관심이 쏠린 바 있다. 일부에서는 상해임시정부에서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보천교(普天敎)를 통하여 조달한 사실이 밝혀진 만큼 보천교를 의식한 발언으로 해석하고 있다. 예컨대 민족종교 보천교에서 5만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조달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수립 초기 인도인을 고용하여 수위로 세웠으나 임시정부 청사 집세 30원과 20원도 되지 않는 고용인 월급을 주지 못하여 번번이 소송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는 국내뿐만 아니라 하와이에서조차 독립운동 자금 조달이 원활하지 못하였다는 반증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5만 원은 임시정부의 회생 자금으로 충분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미군정을 종식시킨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통일 정부가 아닌 남한만의 정부 수립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에 편승하여 남한에 단독 정부를 세우고, 이를 토대로 북한을 통일[북진통일]하려는 2단계 전략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정읍 발언이 분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한다. “좌우 합작 노력이 한창 수반되던 중 38선 이남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여야 된다는 주장을 이승만이 처음으로 공론화하였다”라고 하며 “이승만은 분단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한편에서는 1946년 2월 이미 북한 정부에 해당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정읍 발언은 분단과 무관하다고 보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중차대한 발언을 서울도 아닌 ‘왜 정읍에서 하였느냐’이다. 순회 도중 우발적으로 하였다고 볼 수도 있으나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발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정읍인가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그 정확한 의도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정읍이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일 뿐만 아니라 항일애국운동이 일어난 역사적인 장소라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 기록과 정황에 근거하지 않은 이러한 막연한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동학당의 난’으로 평가되던 시기에 발상지 또는 민주화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정읍을 고려하였을 것이란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정읍은 고창과 부안을 아우르는 전라북도 서남부 지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정읍을 중심으로 대거 군중동원이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점이 참작되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6월 3일 정읍 발언이 끝나자 곧바로 전주를 거쳐 군산으로 이동한 것으로 봐도 그렇다. 1943년에 조사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제39권에 따르면 당시 정읍 인구는 19만 6634명이었다. 따라서 3년 뒤인 1946년에는 20만 명을 상회하는 인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다 정읍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독립운동 자금 지원의 중심지로서 역할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두 민족 지도자가 시차를 두고 특정 지역을 방문, 중대한 발언을 하였다는 것은 우연일 수가 없는 일이다. 백범이 “내가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전후 사정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6·25전쟁 전후 좌우익의 대립

정읍은 6·25전쟁을 전후로 좌우 대립이 심각하여 민심이 아주 흉흉한 지역이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빨치산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특히 내장산 아랫마을 월영의 솔티숲빨치산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정읍은 6·25전쟁 이전인 미군정 시절부터 ‘야산대(野山隊)’라 불리는 공비들의 출몰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공비들은 전쟁 초기에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한 손예환 정읍경찰서장의 목을 잘라 경찰서 출입문에 걸어 놓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1950년 8월 5일 태인에서는 북한군의 만행으로 도래미산에서 대한청년단 정읍군 태인면 간부 단원 11명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태인청년단은 해방 이후 혼란한 국내 정치와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년들이 결사한 민간 조직이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연합군에 의하여 수복되자 인민군들이 1950년 9월 30일[음 8월 16일] 정읍경찰서에 수감된 반공 인사 500여 명 가운데 150명을 고부면 입석리 폐금광으로 끌고 와 몽둥이, 돌, 총 등으로 학살한 후 생매장하고, 나머지 350여 명은 유치장에 감금한 채 타이어에 휘발유를 뿌린 후 불을 질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51년 3월에는 차일혁 경무관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칠보발전소을 탈환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남한의 전기 공급이 가능하게 되었다. 4월에는 역시 차일혁 부대가 내장산을 탈환하였다.

[민주화 운동 관련 사건]

1. 정읍 환표 사건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시절인 1956년 8월 13일 도의원 선거가 있었다. 개표 결과 정읍군 제2선거구 투표함에서 자유당표[엄인섭]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투표함을 바꿔치기한 결과였다. 이에 소성면 지서 순경이었던 박재표(朴在杓)[당시 25세]가 근무지를 이탈, 전주에서 사표를 쓴 다음 서울로 올라가 “국민의 양심으로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 그대로 직장에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결연히 경찰직을 사직하고, 국민 앞에 죄과를 범한 것을 사죄한다”라는 성명서를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제출하였다. 이로써 자유당의 부정선거가 탄로 나게 되었다. 이를 일러 ‘정읍 환표 사건’ 또는 ‘박재표 사건’이라 부른다.

최종 재판 결과 박재표에게는 직무유기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이 선고되었다. 사건 발생 3년 4개월이 지난 1959년 12월 15일 상고심 공판에서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광주고등법원의 판결 내용을 그대로 확정시켰다. 박재표는 4·19혁명 이후에 경찰로 채용과 동시에 경위로 승진되어 종로경찰서 경비계에 배속되었다.

2. 최덕수 열사 분신

1988년 5월 18일 정읍 출신 최덕수(崔德壽)[1968~1988] 열사가 숨졌다. 최덕수는 정읍 배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가정 형편으로 휴학하고 있었는데 1988년 5월 18일 자신이 다니던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에서 분신하여 8일 만에 숨졌다. 최덕수는 광주 영령 추도식 도중 “광주항쟁 진상 규명”과 “국정 조사권 발동”을 외치며 분신하였다. 1987년 6월항쟁에도 불구하고 5공 진상이 규명되지 않자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온 몸을 던진 것이다. 모교인 배영고등학교와 최덕수가 다니던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한쪽에 열사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최덕수의 기념비가 정읍 연지홀[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연지동] 입구에 세워져 있다.

[오늘날의 정읍 농업]

대표적인 수리 시설로 섬진강저수지가 있고, 칠보면에 유역 변경식 발전소인 칠보발전소가 있다. 내장저수지는 상수원으로 이용되는 등 관개 시설이 잘 갖추어져 농업용수가 풍부하다. 농가 인구는 총인구의 27.3%, 경지율은 35.1%이며, 경지 면적 2만 4300㏊ 가운데 논이 76.2%로 논농사가 농업의 중심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고구마 등 식량 작물 외에 고추·무·배추·참깨·사과 등이다. 고추·무·배추 등은 인접한 고창군과 함께 전라북도의 주요 산지이다. 구릉지가 많은 감곡면·북면·소성면·고부면·정우면 등에서는 밭작물이 많이 재배된다. 감곡면은 무·배추·고추 등의 채소류와 인삼 경작이 활발하다. 북면 태곡리 일대에서 고구마가 생산된다. 북면 태곡리의 고구마는 품질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북면에서는 사과가 대규모로 재배되며, 산내면내장동에서는 감이 많이 생산된다. 최근에는 정우면을 중심으로 배 과수원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덕천면·북면·태인면에서는 잎담배가 많이 재배된다. 신태인에서는 은행이 많이 생산되며, 동남부 산간 지대에서는 약초·산나물 채취 등도 이루어진다. 축산업이 활발한 편이며 한육우·젖소·돼지·닭·개 등이 많이 사육된다. 특히 젖소는 정우면의 유가공업체를 중심으로 덕천면태인면에서 많이 사육된다.

[정읍의 문화유산]

2023년 현재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정읍 피향정 등 8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정읍 무성서원을 비롯한 사적 5점, 국가민속유산 정읍 김명관 고택 1점, 수령 290년으로 추정되는 정읍 내장산 단풍나무, 내장산 굴거리나무 군락, 정읍 두월리 청실배나무 등 천연기념물 3점, 명승 삼남대로 갈재 1점 등이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는 태인동헌, 군자정 등 28점,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는 만석보지, 말목장터와감나무, 고부관아터 등 19점,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으로는 정읍농악 등 6점, 전북특별자치도 민속문화유산으로는 남근석, 태인신잠선생영상 등 2점,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로는 정읍향교대성전, 남고서원 등 20점,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정읍 영주정사와 영양사 등 10점, 시도등록문화유산으로 정읍 화호리 구 일본인 농장직원가옥 1점이 있다. 정읍시 향토문화유산으로는 13건이 있다.

이밖에 정읍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정읍시립박물관이 2012년에 세워져 역사의 산교육장 역할을 하고 있다. 2004년에 개관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상설전시관과 어린이전시관,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전라북도로부터 위탁받아 2011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2022년 5월 11일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개원되어 각종 기념행사와 교육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맞은 편 황토현 전적지 내에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과 친일파 김경승이 만든 전봉준 단독 동상을 철거하고 세운 ‘불멸-바람길’이라는 농민군 군상 조형물이 정읍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정읍 관광지와 종교 사적지]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197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내장산국립공원과 201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정읍 무성서원이 있다. 또 정읍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역사 자원 등 지역을 대표하는 것으로 ’정읍 9경’이 있다. 9경은 내장산 단풍터널, 정읍 구절초 지방정원,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정읍 무성서원상춘공원, 백제가요 정읍사문화공원, 피향정 연꽃, 정읍천변 꽃길, 정읍 쌍화차거리, 백정기의사기념관 등이다. 이밖에 구룡동에 라벤더 공원이 있다.

유명한 종교 사적지로 증산교의 교조가 되는 덕천의 강일순 탄강지, 일제 강점기 자칭 600만 교도를 자랑하였던 입암의 보천교, 오늘날 부산의 태극도와 서울 대순진리회의 뿌리가 되는 태인의 무극대도, 호남 최초의 장로이자 목사인 최중진 목사가 세운 정읍 최초의 개신교회인 매계교회,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과 2대 정산 종사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진 정읍 화해제우터, 천주교 시기동성당, 시내 남산동에 있는 전북 최초의 영국 성공회교회 등이 있다.

[정읍의 첨단 산업 연구소 및 기업 입주]

[한국원자력연구원 첨단방사선연구소]

한국원자력연구원 첨단방사선연구소는 원자력 기술의 한 축인 방사선 및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국가 방사선 산업의 확대·발전 및 국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2003년 6월 첨단방사선이용연구센터 기공식이 있었으며, 2005년 3월 정읍분소 방사선연구원의 업무가 개시되었다. 이후 2011년 12월에 한국원자력연구원 첨단방사선연구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첨단방사선연구소의 이용 분야는 공업 분야에서 고분자 재료 가교 및 중합, 나노 소재 개발, 내방사선 재료 개발, 의공학 소재 제조 기술 개발, 환경 분야에서 오폐수 처리, 대기 오염 물질 정화, 유기성 폐기물 처리, 생물 자원 분야는 생물 분자 구조 개선, 생물 신소재 개발, 발암 억제 및 노화 조절제 개발, 공중 보건 분야에서는 방사선 조사 식품의 검지, 품질 보증 기술 개발, 생약재의 안전 저장 및 유통 기술 개발, 식품과 생명공학 분야에서는 식품 가공, 유해 물질 제거 기술 개발, 식량 자원 가공, 저장 기술 개발, 특수 목적 식품 생산 기술 개발 등이 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정읍분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정읍분원은 생명과학 기술 분야의 연구 개발 및 공공 인프라 구축·운영을 통하여 국가 생명 과학 기술, 산업 발전 및 국가·사회 현안 해결에 기여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2006년 11월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정읍분원이 설치되었다.

[한국안전성평가연구소 전북분소]

한국안전성평가연구소는 각종 화학 및 바이오 물질에 대한 안전성 평가 연구 및 지원 등을 통한 국가 산업 발전 및 국민 보건 복지 향상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82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안에 안전성연구실이 설치되었고 1984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한국화학연구소로 이관되었다. 2002년 한국화학연구원 부설 안전성평가연구소로 독립되었고, 2010년에 전북흡입안전성연구본부가 완공되었다. 한국안전성평가연구소의 연구 분야는 일반 독성 시험, 발암성 시험, 영장류 시험, 생식 발생 독성 시험, 유전 독성 시험, 면역 독성 시험, 약리 시험, 독성 병리, 약물·독성 동태 시험, 생태 독성 시험, 환경 화학 시험, 흡입 독성 시험, 체내 분포 시험, 종양원성 시험 등이 있다.

[SK넥실리스]

1996년에 LG금속 정읍 동박공장을 착공하여 1998년 1공장을 준공하고, 동박 생산을 시작하였다. 2000년 LG산전에서 LS전선 기계사업부와 부품사업부로 계열사가 분리되어, LS그룹은 지주사로 전환하여 기계사업부와 전자부품사업부 통합을 위하여 LS엠트론으로 출범하였고, 사명을 ‘LS엠트론’으로 변경하였다. 2007년 사업 영역을 박막[FCCL]까지 확장하고 동박공장 2공장, 3공장을 증설하였다. 2018년 동박사업부를 사모투자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에 3000억 원에 매각하였고, 2019년 SK그룹에 약 1조 2000억 원에 매각되었다. 2020년 SKC의 자회사인 에스케이씨에프티홀딩스[SKCFT]를 통하여 지분 100%를 인수 완료하여, 사명을 ‘SKCFT’에서 ‘SK넥실리스’로 변경하였다. SK그룹에 소속되면서 동박공장 4공장, 5공장, 6공장을 정읍에 증설하였고, 현재 말레이시아, 폴란드, 미국에 공장 증설을 진행 중이다. 2020년 기준 직원 389명이 근무하고 있다.

[다원시스 정읍공장]

2020년 4월 정읍시 입암로 345 일대에 부지 8만 2786㎡, 건축 면적 1만 9592㎡의 다원시스 정읍공장이 들어섰다. 2020년 9월부터 본격적인 철도 차량 생산에 들어가 2022년 5월 31일 신형 간선형 전동차가 첫 생산 되었다. 신형 간선형 전동차 EMU-150[신형 새마을호]은 2019년 한국철도공사[코레일]로부터 208량 3473억 원의 물량을 수주하였다. 신형 간선형 전동차 EMU-150의 설계 최고 속도는 165㎞, 운행 최고 속도는 150㎞로 4량 차량과 6량 차량 두 가지 형태로 제작되었다. 4량은 정원 264명, 6량은 정원 392명 규모로 제작되었다. 기존 차량에 비하여 성능과 디자인을 개선하고 안전성과 편리성을 높였다. 다원시스는 최초 상장 당시 매출이 300억 원이었으나 최근에는 상장 당시 매출액의 10배인 3000억 원으로 설정하고, 10년 안에 다시 10배로 늘린 3조 원을 달성할 목표를 세우고 있다.

[정읍의 전망]

해방 이후 정치적 견해가 다른 두 민족 지도자인 이승만과 김구가 정읍을 방문, 서로 중대한 발언을 하였다. 정읍은 6·25전쟁 전후로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이 심각한 지역이었다. 자유당 정권 시절에는 동학농민혁명의 고장답게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폭로한 박재표 사건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광주 항쟁의 진상 규명을 호소하는 최덕수 열사의 분신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정읍은 그간의 갈등과 상처를 잘 극복하고, 이제는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인구는 1960년대 중반에 27만 명을 넘은 적도 있었으나 이후 점차 인구가 줄어 2023년 4월에는 10만 명대까지 추락하였다. 하지만 전북특별자치도의 타 시군 사정도 다르지 않아서 전주시, 익산시, 군산시에 이어 인구가 네 번째로 많은 도시이다. 2000년을 전후로 한국원자력연구원 첨단방사선연구소,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전북분원, 안전성평가연구소 전북분소 등 3대 국책 연구 기관이 정읍에 입주하였다. 이밖에도 SK넥실리스, 한국방사선진흥협회 정읍센터, 농축산용 미생물산업육성지원센터, 전북대학교 첨단과학캠퍼스 등이 들어섬으로써 정읍은 첨단 산업을 이끌게 되었다. 2020년에는 철도 차량을 생산하는 다원시스 정읍공장이 입암면에 들어서서 정읍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